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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뜻을 품었다. 함께 성제, 의암 부문하에서 위정척사의 의리를 배워 사생취의하고 살신성인하였으니 참으로 지평의병의 두 주역이다. 김백선은 도지평사람인데 의리와 기개가 있어 괴은을 따라 동참하였다. 의진은 원주를 거쳐 12월3일 제천에 이르러 실곡 이필희의사를 대장으로 새워 의진을 편제하고 구일장 회협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20일 영월에서 다시 유인석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의진을 개편하였으니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선봉장, 김백선 좌군장, 원규상 우군장, 안성해 참모, 박주순 사객, 장충식 종사, 이조승, 홍선균, 이기진, 정화용등이다. 의암선생이 군령을 실시하고 팔도에 격고문을 보내 충궐기하여 복수보형할것을 호소하니 이응, 이우, 기정, 이호승, 이명로, 김태원등의병장들이 사방에서 적극호응하였다. 의암선생은 제천과 원주사이에 대진을 두어 서북의 강한 포군을 모으고, 동남의 인재와 전의를 모집하여 굳게 지키며 8도의 인심을 고동시킨후에 목표를 성취할 계획이었다. 그리아혀 제천, 충주, 단양. 청풍, 영월, 평창, 예천, 안동,천안등지에서 일진일퇴의 승패를 거듭하며 각군관위를 점령하고 적당을 토벌였다. 그중 병신년 정월 오일에 시작된 충주전투는 성을 점령하고 관찰사 김규식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수성전만도 28차례나 하는등 4개얼동안 지속되고 이춘영, 주용규, 안승우의병장등이 전사하여 의진의 중추가 약화된 가장 치열한 혈전이었다. 마침내 장기준군과 왜군의 협공에 힘이 부족하여 의병진은 성을 내어주고 후퇴의 길을 걸어야했다. 의진은 군령을 위반한 장졸 김백선, 오장문,유난형을 처형하여 군기를 세워가며 싸웠으나 본디 역부족이라 힘을 길러 재기할 계획으로 강릉, 춘천, 안변을 거쳐 초산전투에서 승리한후 하이성에서 재?배관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이동하던중 동년 7월28일 회인현에서 강제로 무장해제되어 의병진은 거의 한지 8개월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동안 의진은 장괴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저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 예천군수, 유인성 충주관찰사, 김규식등을 참수하고 제천군수 김익진을 무찔렀다. 왜구 장기림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왜군 수백을 죽였으며 잔탕이민옥, 이범재, 양학석을 베는등 왜적과 그 주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의병을 빙자하여 민생을 해치는 나윤달, 박곽산, 유용길같은 내적을 토벌하여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구제하였다. 슬파다 전투로 인한 민가의 피해도 컸지만 의병진에서는 주용규, 서상열, 안승우, 이춘영, 이범직, 홍사구등 6의사와 윤성호, 추치경, 최태헌, 조준교, 나시운, 권섭주, 김성화, 김용주, 김재관, 김정순, 박원용, 손억화, 오문용, 우규진, 우규하, 유재봉, 이경포, 이병선, 임도봉, 주현오, 주현구, 채동집, 홍귀봉, 손용문, 민철훈, 김경달, 임을선, 김수돌, 김선윤등의 수 많은 장종이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 중 국가의 상훈을 추서받은 선열과 그렇지 못한 선열도 많다. 용전분투하며 왜적과 창귀를 토벌하다 구국충혼이 되고서 성명도 전하지 않는 수많은 무명열사는 알길이 없으니 통한스러운일이다. 지평의병은 화문의 위척인맥이 중추가 되었고 호국의 선봉을 올려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장기항전을 하며 빛나는 전과를 올렸기에 전국의병중 으뜸이되어 민족정기를 일깨우고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양혜석 양평문화원장이 이글을 청하니 나는 동향인으로 제의사를 사모하여 그 사모하여 그 사의를 대략 기록하고 이어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