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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의 온겨레가 일제의 가혹한 억압밑에서 일야신음하고 있던 그 무렵 조국의 독립과 민족 의 해방을 위하여 청춘의 정열을 기울여 싸우셨으며 억압의 쇠사슬이 끊어진 8.15이후에 있어서는 민족의 자유행복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하여 꾸준히 분투노력하신 진보적 애국자 근농선생 여운홍선생이 고이 잠들고 계시다. 선생은 서기 1891년 7월 29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여정현선생의 2남 으로 출생하시였으며 위대한 애국자 몽양 여운형선생의 계씨이시다. 1913년 6월 망국의 비애와 애국의 정열을 가슴에 품고 도미유학의 길에 오르셨으며 1918년 6월 미국 우스터대학을 졸업하셨고 프린스톤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시었다. 동년 11월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약소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셨으며 같은 무렵 백악관을 방문하여 한국독립을 호소하시였다. 1919년 2월 독립운동 연락차 일본 동경에 들러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과 접촉모의하셨으며 동년 3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셨고 동년 5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시었다. 그후 미국으로 귀환 한국독립운동에 분투노력하였으며 1920년 상해 한인인성학교 교장으로 계셨다.1921년 9월 선생은 입국도중 왜경에게 검거되시였으며 그 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시고 조선체육회 상무이사로서 우리나라 체육발전에 진력하기도 하시였다. 일제말기인 1939년 4월 왜경에게 검거되셨고 1943년 12월 다시 왜헌병에게 검거되시였다. 위대한 8.15해방과 동시에 자주 독립 통일의 민주조국건설을 위하야 일야분투하시게되었다.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대표로서 인천해상에서 유엔군 사령관을 환영하시었다. 194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