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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절의는 국태민안하는 민생의 기본윤리이다. 우리 양평은 국동근부로 산자수명하여 예로부터 지사대부가 많이 살아 충효절의를 숭상하는 기풍이 국가의 원가가 되어왔다. 조선말기에 유림종사인 화서 이항로선생이 벽계에서 도학을 강론하고 위척사를 주창하여 충효도학절의의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풍천 양주석, 동우 장회진, 하거 양헌수, 중암 김평묵, 운암 박문일, 소제 유중교, 면암 최익현, 금계 이근원, 의암 유인석, 려지 홍재학, 화남 박장호 제현이 그리한분들이다. 화서선생 몰후8년에 왜적은 시랑과 같은 야만성을 드러내어 고의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병탄을 목적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정병하등 간적을 사주하며 내정을 간섭하더니 마침내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를 협박하여 욕보이는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속하였다. 조정에는 적당이 들끓어 나라는 망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난신적자를 누구나다 벨수있는것은 춘추의 필법이요 먼저 적을 치고 뒤에 고하는것은 후현들의 달권이다. 이에 유인석선생이 제천장담에 문인사우를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하였는데 하사 안승우, 괴은 이춘영 두 의사는 거의소청을 주장하였다. 이때에 창을 준비하고 적당이 오기를 기다리던 퇴안 안종응과 하사, 괴읜, 김사정, 김용준의사가 모의하여 괴은이 김백선을 설득하고 고을사람을 의로로 개우쳐서 수일만에 의병사백여명을 모집하였다. 드디어 단기 4228년 을미11월 27일 지평에서 거의하여 밤새도록 군사와 병기를 원주 안창리로 집결시켜 다음날 창의호국의 깃발을 높이드니 전국의병중에서 가장 우뚝하였다. 하사는 순흥인이니 병자절신 안광욱의 9대손이며 부는 종응이요 괴은은 덕영인이니 택당 이직선생의 9대손이며 부는 민화이다. 두 의사는 양동에 세거하였는데 호걸의 기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