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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과 의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위해 목숨을 홍모와 같이 생각하는 이를 애국지사라 할 것이요. 국가 흥망성쇠는 애국애족을 실천하는 이가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충과 의를 실천한 사실은 구한말 의병활동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덕유산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항전과 혁혁한 전과를 올린 문태서 장군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장군은 1880년 이곳 장구지에서 남평인 강성군 문익점 선생의 23세손으로 태어나 5세에 한학에 입문하여 소년기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1904년부터 금강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중 1905년 11월 일제 침략자들이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방문하여 모병기의를 밀의하고 귀향하여 1906년 60여명의 동지들을 모아 창의하였다. 원통사에 기지를 두고 그 해 9월초 안성에서 왜병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한 것을 시작으로 경남과 전북, 충북, 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신출귀몰한 작전을 전개하여 노획한 무기와 사살한 왜군의 수가 수백에 달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용감무쌍한 기백은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왜군은 장군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주민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는데 광분하였다. 1911년 8월 17일 애석하게도 왜경에 체포되어 진주 대구를 거쳐 서울로 압송 수감되었다가 1913년 2월 4일 34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였다. 장군은 왜적과 친일악질 분자를 척결해서 가난한 인민들을 보호하였으므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1909년 4월 무주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문태서 장군 송덕비를 세운 것을 볼 때 그의 고결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장군의 굽힐 줄 모르는 의기와 희생정신은 애국애족과 조국근대화 사상의 싹을 틔웠고 해외 독립투쟁에도 영향을 주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정부에서는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서울 국립묘지 광복선열묘역 충렬대 6번에 안장하였다. 그의 용감하고 의로운 투쟁정신은 우국충혼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며 후손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어 애국심을 일깨우고 조국 수호와 민족번영의 길로 인도하는 귀감이 되었기에 이를 기리고자 군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1999년 8월 15일 함양군 순국사적비 건립위원회 짓고 광복회장 윤경빈 감수 전면 제자 여강 이창구 쓰고 함양군수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