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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장구지동에서 탄생하였는데 아버지는 병현이요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장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절륜하며 서사에 능통하였다. 1904년에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군은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고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강탈하는 동시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내정을 간섭하므로 장군은 금강산을 나와 이듬해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이 대마도로 잡혀간 뒤 집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강행한 뒤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으로 화하여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선봉장 박춘실 등과 함께 여러번 무주 장수 용담 안의 거창 지례 남원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하고 혹은 상주 영동 옥천 안성 등지에 출동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1909년에 전국의 의병이 총연합하여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고 서울의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할때 장군은 서울로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이원에 이르러 서울 공격이 중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원역을 폭파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1910년 합방 이후부터는 대대적인 일본군의 반격전을 만나 소부대 유격전으로 전술을 바꾸어 항전을 계속하던 중 1912년 8월 17일 본가에 돌아온 사이에 왜군밀정의 위게에 빠져 일군에 체포되어 1913년 2월 4일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서울에서 옥사하였다 유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