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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1910)년 후 9년인 무오(1918)년 겨울에 고종황제께서 사직을 위하여 순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치 부모님의 상을 당한것 같이 통곡하고 뛰면서 먹지 않으며 만사가 모두 풀리지 않았다. 다음 해 기미(1919)년 5월 29일은 즉 서기로 3월1일이었다. 대한독립만세의 소리가 처음으로 한성에서 일어났고, 서울로부터 면과 면으로 서로 이어져 가만히 단체를 맺어 전국에 통하였으며 또한 만주에 거주하는 민족에게도 도달하여 대한독립만세의 의거가 천하에 소문이 나서 열강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모두 우리 한국의 인민이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았음이 또한 이미 틀림없으며, 일만 사람들의 입에서 한결같이 마음이었으니 또한 가히 백성들의 아름다운 인륜은 끝내 실추하지 않음도 볼 수 있게더라. 이러한 떄를 당하여 공은 스스로 말하기를 '이 기회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하고는 즉일에 은밀히 전군의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동지사이에 의족을 체결하고 모든 인원과 모일에 모여서 독립만세의 소리를 부르기로 약속하였으니, 2월 27일 극 함양의 장날이었다. 정순길군과 함께 부르다가 체포되었고, 5일을 지나 공은 또 하승현과 윤영하군및 수백여인의 약속하였던 사람들과 더불어 특별히 태극기를 걸어놓고 재차 부르며 곧장 헌병대의 문앞에 이르자 승현군은 혼자 왜놈에게 잡혀 조총의 탄환을 맞고 국었으니 어쩌면 그다지도 슬플까? 공은 혼자 앞장서서 부르다가 즉시 체포되어 옥중에서 여러 차례 악형을 만났으나 꾸짖눈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으며 죄수로 3년간 구속도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셨다. 출옥한 후에 여러해를 병으로 신음하다가 마침내 별세하셨으니 즉 계유(1933)년 5월 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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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슬프다. 이로부터 이후로 상해 임시정부를 만국이 승인한 후로는 이래로 민주라 명칭하였다. 을유(1945)년 일본의 오랑캐가 해외로 몰아서 쫒아냄이 실제로 한 때 3.1운동의 힘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 부자의 어짐과 군신의 의로움은 천지의 상경이며 고금의 통의이다. 무릇 신하나 자식이 된 자는 하루라도 이것을 강론하지 않으면 사람은 가히 사람이 될 수 없고, 국가도 가히 국가가 될 수 없나니 돌이켜 보면 가히 두렵지 않으랴. 공과 같은 분은 들어오면 그 효성을 다하였고 나가면 그 충성을 다하였으니 실제로 어진 선조의 어진 후손으로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옛날에 이른 바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고 하였던 것이 공에게는 거의 가까울 것이리라. 함양에 독립의 의로운 소리가 원근에 소문난 것은 실로 공께서 십수년 동안 붉은 혈성의 소치이었으니 아! 역시 거룩하구려. 무릇 우리 고을의 사람인 자는 누군들 가히 생각하면서 가히 잊지 아니하지 않으랴. 이것이 금일에 기념비를 세우는 까닭인 것이다. 금년 봄에 먼저 김씨의 종친회로부터 처음 논의가 발의되자 향인들도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며 특별히 풍성한 비석을 읍의 서쪽 상림 가운데 세웠으니 이것을 보면서 잊지않겠다는 뜻이었으며 또한 가히 의를 좋아함이 돈독함과 선생을 권장함이 깊음을 볼 수 있겠더라. 단기 4300년 정미(1967) 10월에 의사 김한익기념비 건립위원회는 삼가 씀 출처 : 함양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