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page


177page

공의 성은 김씨요 휘는 한익이며 자는 명진이니 경주인이며 즉 고려말에 순신이셨던 수은선생 휘 중한의 19세손이다. 조부는 이규이니 통정대부로 중추원의 의관과 의금부의 도사이셨고 선고는 석구니 호는 위정이요 통정대부로 승정원의 비서승과 순천군수를 역임하며 모두 향리의 명망이 있으셨다. 공은 고종 정해(1887)년 9월 13일에 태어나셨다. 태어나자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부모를 잘 섬기며 부모님의 뜻과 몸을 갖추어 극진하게 봉양하니 종훈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고 또한 뛰어남으로 군중들과 같지 않았으며 소시로부터 비분강개한 뜻이 있어 매일 글을 읽다가 충신과 열사의 편에 이르면 일찍이 세번씩 되풀이하여 읽으며 감탄하지 않음이 없으니 장자들이 모두 원대하게 되리라고 기다하였다. 장성하게 되어서는 슬픈듯이 사방의 뜻이 있으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특별히 숭혜전의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역시 좋아하지 않았으며 경술(1910년)년 한일합방의 변을 듣고부터는 슬픔과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곧장 일본에 항거하여 투쟁할 뜻이 있으시어 가정의 일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원근의 동지들을 체결하여 비밀히 지하운동을 전개한 것이 또한 십수년이었다.
177page

公姓金氏諱漢益字明振慶州人卽麗末純臣樹隱先生諱沖漢十九世孫也祖曰履奎通政 大夫中樞院議官義禁府都事考曰錫九號渭汀通政大夫丞政院秘書丞歷順川郡守皆有 卿望公以 高宗丁亥九月十三日生有異質善事父母備盡志體之養宗黨稱其孝性又 倜儻不群自少有慷漑志每讀書至忠臣烈士之篇未嘗下三復感歎長者皆期以遠大及長 慨然有四方之志朝議特 除崇惠殿參奉公亦不屑屑而自聞庚戌韓日合倂之燮不勝病 憤卽有抗日鬪爭之志不顧家事締結遠近同志秘密展開于地下運動者亦十數年矣庚戌 後九年戌午冬聞 高宗皇帝殉社之報如喪考妣哭踊不食萬事皆未解矣翌年己未正月 二十九日卽西曆三月一日也大韓獨立萬歲之聲始起於漢城自京面面相屬暗結團體通 于全國亦達于滿州居住民族大韓獨立萬歲之義聞于天下至使列强諸國皆知我韓人民 之不服于日本者亦已番矣而萬口一心亦可見民彛之終不墜也當是時公自以謂不失此 期會卽日密巡乎全郡之坊坊谷谷諦結同志間義族諸員約以某日會唱獨立萬歲之聲二 月二十七日卽咸陽市日也鄭君淳吉倂唱被囚粤五日公又興河君升鉉尹君榮憂及數百 餘約人特揭太極旗再唱直至于憲兵門外升鉉獨被倭烏統中丸而死何其慘也公獨以首 唱卽時逮捕獄中屢遭惡刑罵不絶口拘囚三年終不屈焉出獄後屢年沈疾竟不叔卽癸酉 五月七日也嗚呼悲夫自此以後上海假政府之承認於萬國後來民主之名稱乙酉日虜之 驅逐海外實蒿矢于一時三一運動之力也噫父子之仁君臣之義夭地之常經古今之通誼 也凡爲臣子者一日不講此則人不可爲人國不可爲國顧不可畏也哉若公八而盡其孝出 而竭其忠實無愧爲賢祖之肖孫古所謂求忠臣於孝子之門者公其廡幾乎咸陽獨立之義 聲聞于遠近者實公之十數年赤血所致也呼亦韙矣凡吾鄕人者孰不可念而永世不忘者 乎此今日紀念碑之所由起也今年春先自金氏之宗親會始發論鄕人莫不義之特竪豐珉 于邑西上林中以示不忘之義亦可見好義之篤而獎善之深也 檀紀 四三00年 丁未 十月 日 義士 金漢益 紀念碑建立委員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