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page

7 m 이에 미 제2사단은 좌에서 우로 제9·23·38연대 순 3개 연대를 병진대형으로 전개하여 포문을 열었다. 공격 첫날 좌일선의 미 제9연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진 앞에서 공격이 꺾었고 반면 중앙 일선인 미 제22연대는 16일 새벽, 곧 아군이 공격하기 5시간 전 적이 C중대를 기습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3대대를 주공으로 하여 주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고 12시를 조금 지난 무렵부터 아군 전폭기의 지원이 개시될만큼 날씨도 호전되었다. 미 제23연대장은 제3대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전과 확대로 전환하는 즉시 퇴각한 적을 추격 하였고 상황이 호전되자 제2대대는 박진 나루터를 통제 할 수 있는 전술적 중요한 208고지를 탈환하였다. 아군 전폭기는 혼란상태로 빠져들어 무질서 하게 낙동강 서안으로 걸어서 물 건너는 적을 맹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고 적 퇴각은 다음날 계속되어 17일에는 낙동강 동쪽 오봉리∼본초리 일대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로써 미 2사단의 적 방어진지 돌파작전은 거의 일단락되었고 당시 격전지였던 창녕의 교상리에는 북한군 4사단과 전투를 벌여 낙동강을 사수한 미군의 공을 기리고자 1959년 3월 31일자 창녕지구 전적비가 세워졌다. 33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