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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묻힌 서희 장군은 후삼국의 분열을 능히 극복하고 민족 국가의 기반을 다시금 정비하게 된 고려왕조의 건국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국가주권의 수호와 서북녁 강토의 개척에 큰 공훈을 세운 문무겸전의 주석 같은 존재였다. 왕건태조 말년에 테어나 광종11년(960년) 과거에 급제하고 차츰 승진해서 청년의 교관으로 바다건너 송나라와의 국교정상화에 남달리 공헌함으로 그 이름을 떨치었다. 성종 초년부터 좌승 병관어사를 역임하고 거란족의 남침에 대비하여 서북변경의 국방체제를 확립하도록 힘을 기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12년(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청천강 기슭까지 남침하여 고구려의 옛땅은 저희 것으로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차지할 수 없으니 내놓으라고 강요하는것이라 조정의 일부에서는 국토의 한쪽을 떼어 주고라도 화해하자는 주장까지 대두하였다. 주중군사 서희장군만은 감연히 저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스스로 적진에 달려가서 소손녕을 상대로 고려는 국호부터 구구려의 후계임을 말하고 있으니 내놓을 것은 우리가 아니요 그대들이라고 정정당당하게 담판을 전개한 결과 그토록 드세던 소손녕도 마침내 저희에 대한 외교상의 예우만을 약속받고 자진해서 선물까지 보낸 다음 철군하고 말았다. 이 처럼 거란의 대군이 물러가자 서희장군은 그 기회를 놓치지않고 지금까지 압록강 동안에서 발호하던 여진족을 몰아낸 다음 전후 4년 동안에 이른바 강동6주를 개척하여 축성을 완료하고 묵종 초년(998)에 출장입상의 57세 한평생을 조국에 바쳤다. 대한민국 오늘엔들 그 위업과 유훈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겨레의 비원인 국토통일의 영광된 앞날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