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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태조의 건국 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때는 바야흐로 중원대륙 동몽고 지대에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 12년 서기993년에 처음 침구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다시 4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므로 고려에서도 강조 장군이 30만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때에 그의 나이 64세였다. 현종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에 재상을 겸한 채 서경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섯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명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 막았다가 적들이 오자 갑자기 물을 터서 적군을 크게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 다시 다른 길로 송경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나며 귀성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었다. 때는 3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이야말로 고려 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 지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 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2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 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 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런 공신호를 내려 주었다. 장군은 73세로 조정에서 물러나 성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은거하며 낙도 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했으며 현종 22년 서기 1031년 8월에 세상을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9백여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