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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내니촌(文乃尼村)(지금 함흥 운홍리 부근)에 이르러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성문을 닫고 숨어 버리므로 공은 특과대의 날랜 부대를 동원하여 성을 깨뜨려 달아나게 하고 또 좌군과 힘을 합해 석성(지금 함흥 고양리 부근)을 쳐서 적의 전부를 섬멸시켰다. 이리하여 고려군대가 여진족들의 촌락을 불사른 것이 135촌, 목 벤 것이 4940명, 사로잡은 것이 1030명에 달했던바 공은 그것을 조정에 보고함과 동시에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국경을 확정케 하고 몽라골령(蒙羅骨嶺)아래 영주성을, 화관령(火串嶺)아래 웅주성을, 오림금촌(吳林金村)에 복주성을 궁한이촌(弓漢伊村)에 길주성을 쌓고 다시 이어 영주성안에는 두 절을 지어 숙종의 맹세대로 이뤄 드렸다. 해가 바뀌어 왕의 3년 1월에 공은 8,000명을 이끌고 가한촌(加漢村) 병목 좁은 길을 치다가 우야소(鳥雅束) 무리의 포위를 입어 위태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며, 적장 알색(斡塞)의 무리들이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와서 영주성과 웅주성을 칠적에도 매양 곤경에 빠졌지마는, 그때마다 녹사 척준경의 용맹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3월에는 앞의 네 성과 함주, 공험진 등 여섯 성을 새로 쌓은 뒤에 아들 언순을 보내어 헌공표(獻功表)를 올리고 또 임언을 시켜 영주청벽에 성 쌓은 사실을 적어 붙이게 하는 한편 남방으로부터 무릇 6천4백6십5호의 인민을 옮겨와 거기에 터전을 잡게 하고 또 의주, 통태, 평융등 세 성을 더 쌓아 모두 아홉 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의 직함을 주고 4월 9일 개경으로 개선했을 때에는, 상하의 온갖 융숭한 환영을 이를 길이 없었다. 돌아온 지 몇 날이 못되어 여진족들이 웅주를 포위하므로, 공과 오연총은 다시 나가 큰공을 세워, 공에게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을 봉했으며, 이듬해 4년 5월 길주 싸움에서는 크게 이긴 그대로 두만강 건너 선춘령에 비를 세워 여기까지가 고려의 경계라고 큰 글자를 새겨 고려혼(高麗魂)을 외친 이거늘 어찌해 운명의 신은 시기하기 시작하던고, 이때 여진은 아홉 성을 돌려주면 신사백세(臣事百歲)하겠읍니다하고 고려조정에 애원하자 나약하고 공을 질투하는 평장사 최송사등 이십팔인은 9성 반환을 극력 주장하고, 다만 예부의 박승중과 호부의 한상만이 반대할 따름이라 대세는 결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7월에 철수를 단행했는데 아홉 성중에서 의주, 공험진, 평융진은 빠지고 숭령, 진양, 선화진등 딴 이름이 고려사에 적힌 것은 아마 뒤에 새로 쌓은 것들이리라. 공은 이천리밖에서 이 명령을 받고 분함을 머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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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했는데, 왕은 사신을 보내어 떠날 때 내려준 도끼마저 중도에서 도로 거두어 가는 것이므로, 복명할 겨를도 없이 다만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 채 공신호조차 삭탈당했던 것이다. 그 심경 어떠했으랴. 그 위에 금해하는 대신들은 공에게 죄를 주자고까지 했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셨다. 한해가 지나 5년 겨울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했으나, 공은 거듭 사양하다가 왕의 뜻을 받들어 전날의 통분을 되새겨 재기의 뜻을 품던 중 이듬해 6년 서기1111년 5월 8일에 말없이 눈을 감으니 향년(享年)61세,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요, 뒤에 문숙(文肅)이라 고치고, 인종 8년에 예종의 사당에 배향하였고, 이조에 와서는 숙종께서 숭의전(崇義殿)에 공을 배향하셨다. 공의 본관은 坡平, 자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묵齋), 고려 태조의 삼한공신 휘 신달의 5대손으로 부친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 문정공(文靖公) 휘 집형이었다. 공은 일찌기 젊어서 문과장원에 올라, 습유보궐(拾遺補闕)을 거쳐 송나라에 사신도 갔고, 동궁시강학사어사대부이부상서(東宮侍講學士御史大夫吏部尙書)를 지나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를 역임하며, 평소에 어진 이를 사랑하고 의리를 숭상하여 들어와선 대신이 되고, 나가서는 장수가 되었던 문무를 겸전한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부인은 인천 이씨로서 고려상장군 성간(成幹)의 따님이요, 7남2녀를 낳았는데 1남 언인은 합문지후(閤門祗侯)요, 2남 언순은 남원부사요, 3남 언암과 4남은 출가했으며, 5남 언식은 수사공(守司空)이요, 6남 언이는 정당문학판호병형부사상주국문강공(政堂文學判戶兵刑部事上柱國文康公)이요, 7남 언민은 상의봉어(尙衣奉御)로 서화의 명인이었다. 뒷날 자손들이 번창하여 이제 와서는 남원과 함안과 덕산과 화산 곧 신령 등으로 나뉘었으나, 모두가 문숙공의 후예이니 그야말로 뿌리 깊은 큰 나무인지라 꽃과 열매가 풍성하게 열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공은 다만 어느 한 가문의 인물이 아니라 민족정기의 표상이었던 분이니, 그러므로 공의 의기는 그대로 민족의 의기요, 공의 한됨은 또한 민족의 한인 것이다. 겨레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금옥같은 아홉 성을 여진의 갈뢰전(曷賴甸) 땅으로 내어주고, 일세의 개선장군이 하루아침에 패전장의 누명을 쓰게 될 적에 얼마나 분했으랴만, 그것은 결코 개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