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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德十二年丁丑太學生等」上言文忠公鄭夢周有忠孝大節理學爲東方之」祖有功於斯文甚大請配享文廟」上允可其年九月十七日配享于文廟西廡文昌」侯崔致遠之後又令修墳墓立表石以禁樵牧」其書官繫以高麗不書文忠公者盖明公不事」二姓之本意也公平生事跡具在高麗列傳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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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德 12年 丁丑(1517년)에 태학생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문충공 정몽주는 충효하고 大節하며 성리학으로는 동방(조선)의 시조가 되어 이 학문에 공이 매우 크니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上이 윤허하였다. 그해 9월 17일 문묘 서쪽 채 文昌侯 崔致遠의 뒤에 배향하고 또 무덤을 정비하고 표석을 세워 땔나무를 베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고려에만 관계되는 벼슬명을 쓰고 文忠公이라 쓰지 않은 것은 대개 공이 두 姓을 섬기지 않은 본 뜻을 밝힌 것이다. 공의 평생의 사적은 모두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다. 출처 : 다음 블로그 청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