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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상징이였던 종묘사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녕지역까지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仰巖寺)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왕씨 자손이 남몰래 위패를 거두어 이곳에 묘를 짓고 이를 봉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 있던 앙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때 철원과 개성의 중간지점이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에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원찰(願刹)로 고려 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앙암사(仰巖寺) 아래 머무르게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닌 신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밤 심한 폭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앙암사를 때려 절은 형체를 알수 없게 파괴되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한다. 당시 마전 군수는 이러한 여러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조선 태조6년(1397)에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게하고 고려의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그 아들 상장군 왕조(王祚)에게 귀의군을 습봉(襲封)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또한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가까운 고을의 장정을 징발하여 태조신성왕묘(太祖神聖王廟)를 짓게 했다. 또한 앙암사가 벼락에 파괴될 당시 경내에 있던 큰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속에 잠겼는데 그 후 이못에서 국난(國難)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미리 예견햬다고 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수면이 잔잔한날 잠두봉 정상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면 그때 강속으로 잠긴 범종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