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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발발하자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학도들이 들고 일어났다. 학생과 청년신분이었던 이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오로지 조국을 향한 구국일념으로 자신의 안위와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풍전등화의 조국으로 뛰어들었다. 이들 한인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심사를 거쳐 동경 아사카 캠프에서 유엔군과 함께 2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에 머물던 거류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준 의용군 휘장을 미군 군복 상의나 군모에 달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들이 고국 전선에 참가하기까지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의용대를 조직한 이들은 UN사령부에 한국전선에 참전케 해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쓰러져 가는 고국의 현실을 통탄하며 서로 껴안고 통곡을 했다. 그러나 대표들이 다시 UN사령부를 찾아가 국민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겠다고 자원하는데 거부할 권리가 어디있느냐고 항변했다. 결국 UN사령부는 이들의 애국심을 인정하게 돼 참전이 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훈련을 받은 제1진 69명이 1950년 9월 1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면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의 6·25전쟁 참전이 시작됐다. 이후 11월 중순까지 5차례에 걸쳐 총 641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의 전선에 참전해 135명이 전사(실종자 포함)했다. 이들 대부분이 일본 영주권을 보유해 한국에서의 병역의무가 없었지만 조국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뛰어든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부산 동구 초량동의 소림사에서 머물며 일본 정부의 입국 허가를 기다렸지만 일본 정부는 출국 허가를 받지 않고 나갔다는 이유로 재입국을 거부해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일본으로 돌아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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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 href=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658 target=_blank>울산 매일</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