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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 자원병이 조국의 전장에 1950년 8월 8일, 민단 중앙본부에 자원군지도본부(본부장 김광남)을 설치, 동월 12일에 자원병모집을 위한 요강을 전조직에 전달했다. 민단 아이치에도, 중앙의 지시를 정리해서 지원병을 모집, 19명의 애국청년이 응모해서 사이타마현, 조로기지에 있는 미군 제8군 제1 기병사단 제6069 보충대대에 입대했다. 1950년 9월 13일 제1진 280명이, 9월 24일에 제2진 137명이, 9월 27일 제3진 98명이 조국의 전장에 참전했다. 재일 자원입대병의 대부분은 미군 제7사단의 제17연대, 제31연대 즉 제8군 제6 보충부대, 제45부대, 제60부대, 제92화기중대등에 배속되어 주로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이원상륙작전, 서울 탈환작전, 임진강 고랑포작전, 수도재탈환작전, 수원지구작전, 철원삼각지작전, 동부 강릉작전에 참가했다. 제92화기중대는 미군으로 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전투가 치열해짐에 따라 격전에는 격전, 피로 피를 씻는 동족상살의 비국을 전개되어 많은 재일지원병이 전사 혹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세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없이 지금의 한국발전은 있을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적다. 60년사는 사실을 적은 일기가 아니고, 진실을 전달하는 우편엽서있는것 같다. - 재일 학도의용군 동지회의 결성 연합군과 한국군의 반격에 의하여 북한의 야망이 붕괴되는가 했지만, 1950년 11월 중국의 참전에 의해서 전선은 또다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연합군의 결정에 의하여 38도선마저 무조건 철수했다. 그후 전선으로부터 후퇴하는 미군부대와 같이 자원입대병등에 대해서, 제대 귀환령이 내려저, 부산의 소림사에 자원병들이 집결했다. 일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은 주권국을 회복했다. 이것이 당시 한일간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재일 자원병은 일본입국이 거절되었다. 귀한을 단념한 자원병들의 유지는 54는 9월, 서울시 종로구 재일한교학도의용대를 창립되었다. 일본에서는 1951년 10월 22일, 중앙본부 강당에 '자원군 전몰, 전상자 유가족 원호기금모집 위원회'가 개최하여 일본에의 동지회가 설립준비를 계속하여 1965년 10월 22일 '재일 학도의용군 동지회'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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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 href="javascript:void window.open('http://www.dmook.co.kr/gallery/view.asp?seq=184949&path=120514190018','','directories=no,menubar=no,location=no,toolbar=no,status=no,resizable=yes');">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중부연합회(愛知) 회보</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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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방명자 명단 추가예정 다음은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중부연합회(愛知)에 나온 관련 자료를 번역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