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page

1. 원주경찰 전적탑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노림리 산6 모산고개 2. 원주시 현충탑 강원도 원주시 태장1동 124 3. 육군 심일소령 기념탑 강원도 원주시 태장1동 124 4. 원주지구전투전적비 강원도 원주시 태장2동 1667 5. 고 이순학 대위 순직기념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1432 매지공원 내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지역이 공산화되자, 전 가 족과 함께 1945年 12月 자유대한으로 월남하였다. 월남 후 서울대학교 사범 대학에 진학, 2학년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교하였다.다음 해인 1949年 5月 23日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여 춘천지역에 주둔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개전 초 북한군은 10여대의 탱크형 자주포를 선 두로 춘천지역으로 물밀듯이 진격해오자, 탱크형 자주포의 진출을 저지하라 는 임무를 받은 심 일 소령(당시 중위)은 춘천 북방 지내리 1.5km 지점인 서 원고개로 급파되어 2문의 57미리 대전차포를 배치하고, 적자주포가 지근거 리까지 접근하자 사격을 가해 명중시켰으나 적의 자주포는 잠시 주춤거리다 가 다시 진격해왔다. 57미리 대전차포로는 적자주포를 파괴할 수 없다고 판 단한 심 일 소령은 일단 소대원을 철수시키고 육탄공격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화염병을 급히 제조하여 특공조 5명과 함께 적의 탱크 형 자주포 측면으로 은밀히 접근하여 선두 탱크형 자주포 2대의 포탑위로 올 라가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하여 폭파시키자, 뒤 따르던 8대의 적자주포는 북쪽으로 퇴각하였다.이와 같은 심 일 소령의 투혼으로 아군은 자신감과 용기 를 얻어 육탄공격을 도처에서 감행하였다. 수십대의 적탱크 및 자주포를 파괴 시켰으며, 기계화 부대를 앞세워 단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하려던 적의 기세를 좌절시켰음은 물론, 아군이 춘천지역을 2일간이나 방어함으로써 적의 서울 방향 진출저지와 유엔군이 증원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 을 하였다.그 후에도 심 일 소령은 충북 음성지역 전투, 경북 영천 304 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국군의 반격 작전이 감행되었던 1951年 1月 26日 강원도 영월지역 전투에서 제7사단 사단수색중대장으로 최일선에 서 정찰임무를 수행 중 적의 총격을 받아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애석하 게도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정부에서는 1951年 10月 임전 무퇴의 강인한 정신으로 부여된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함과 동시에 소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다. 한국전쟁 중 위관(尉官)장교로서는 최초로 태극무 공훈장을 수여 받은 것이다. 69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