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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양경찰충혼탑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482-3 2. 수복기념탑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374 속초여객터미널 앞 3. 영랑호 순국5용사비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579-2 보광사 뒷편 남쪽 4. 이형근장군 덕정비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충혼비 뒤 뚝적바위 위 5. 통전군 순국동지 충혼비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595-37 1954년 당시 속초읍장이었던 김근식, 피난민 연락소장 박상선, 반공개몽인 박성주등이 수복을 기념하고 피난민의 향수를 달래기위해 당시 제 1군단민 사처 보좌관 전형윤 소령을 통해 건의하여 당시 제 1군단장 이형근 장군의 승 락을 얻어 피난민의 희사금, 속초읍 부담금, 군부대의 차량지원으로 1954년 5월 10일 건립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3년 4월 27일 동해안을 휩쓴 강풍으 로 탑위의 모자상이 부서져 버렸다. 그러자 범시민적인 수복기념탑 보건 건립 위원회가 발족하여 시민의 성금과 속초시 지원으로 1983년 4월 17일 역사 적인 재약식을 가졌다. 탑의 설계 및 모자상 조각은 원래 모자상을 조각하였 던 박칠성이 담당 하였으며, 보건된 이탑은 좌대폭 4.6m,탑신높이 7m, 모자 상 높이 2.55m이다.탑은 상하로 구분하여 상층탑신 4면에는 전형윤 소량이 쓴”수복기념탑”이란 휘호를 그대로 오석에 옮겨 조각하였으며, 하층 탑신 동 쪽면에는 수복기념탑 복원기, 서쪽면에는 장호강 시인이쓴 “모자형상”, 남쪽 면에는 당시 동우대학장 한상갑이 쓴 “민족통일” 이란 휘호, 북쪽면에는 청동 으로 조각한 “군.경.민 입체 북진상”이 새겨져 있다.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직을 지낸 군번 1번의 이형근 장군의 덕정비가 있었 던 곳. 비석은 없어졌으며, 아무런 설명판도 없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대한민국 육군 ‘3大將’ 중의 한 축인 이형근(李亨 根) 육군 대장은 1920년 12월 2일 충남 공주에서 미국계 상사를 운영하던 개화가정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오늘날의 경기고등학교인 경성제일고 보에 입교한 후 다시 고향 인근의 청주고보를 마치고 1942년 일본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하였다. 조국광복 후 고향 인근의 대전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1945년 11월 미 군정 당국으로부터 “한국군의 모체인 조선 국방경 비대에 참여하라”는 끈질긴 권유와 이응준(李應俊) 장군의 권고를 받고 국군 최초의 간부 양성기관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군번 1번의 육군 정위(대위) 로 임관되었다. 1946년 2월 대전의 제2연대 창설에 전념한 그는 두 달 후 소 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국방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인재 를 배출하고 9월에 다시 제2연대장으로 복귀했으나 채 한 달도 안되어 초대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군기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8년 2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통위부 초대 참모총장에 오른 그는 한국군 최초로 미 조지아주의 포토 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의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그러던 중 준장으로 진급과 함께 주미 한국대사관 초대 무 관에 임명되어 대미 군사원조 획득을 위한 군사외교에 나섰다. 1949년 6월 귀국 후 강릉에서 신설될 예정이었던 제8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사단창설에 주 력하였으며, 6.25전쟁 발발을 5일 앞둔 1950년 6월 20일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장에 보임되었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휴전협정 조 인으로 전쟁이 일단 종결되자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여 합동참모회의 의장에 올랐으며, 2년 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8월 16일 현역에서 물러나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후 1961년 주필리핀대사를 시작 으로 영국, 스웨덴,노르웨이 등 주요 국가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외교사절의 중 책을 완수한 그는 1971년 향군회 고문과 1976년 반공연맹 이사장, 1980년 입법회의의원, 1981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57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