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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충혼탑 (양양군)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25-1 현산공원 내 13. 필승탑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25-1 현산공원 내 14. 행정수복기념탑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25-1 현산공원 내 취지문 본군은 38위북지역으로서 과거 적치하에 공산하정을 반대하여 항전발기하 다가 투옥 또는 학살당한 숨은 반공애국투사가 불소하며 또한 6.25 동란당 시 용전분투하다가 산화한 전몰군경이 상당수에 달하며 그 뿐아니라 기미년 3.1운동당시에도 일제의 학정에 항거하여 투옥 또는 학살당한 무수한 항일 액구선열이 있는 바 이제 이들 호국영령의 숭고한 정신과 위훈을 기리 추모 하고 이들의 애국심과 반공정신을 전군민에게 계몽고취시켜 정부가 지향하 는 조국근대화 작업에 관민 혼연동체가 되어 총매진하기 위하여 이곳 현산공 원에 충혼탑을 건립함. 국제 태권도 연맹이 주장하는 태권도의 창시자 최 홍희총재가 1952년에 군 의 사기를 위해서 쓴것이라고 한다.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으로 1960 년부터 제2훈련소장, 1961년부터 6군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 편하였다. 1959년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다.1961년 논산 육군훈련 소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박정희와 쿠데타를 논의하였으나, 쿠데타 성공 후 소 외되어 주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였다.1966년에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립한 후 총재로 취임하였으며, 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한 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고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하였다.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고 한다. 38도 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됨으로써 양양군의 행정영역은 현남면과 현북 면의 잔교리, 대치리, 명지리, 법수치리, 면옥치리, 어성전리,원일전리, 장리 와 서면의 서림리, 황이리, 갈천리 등으로 한정될 수 밖에없었다. 이후 양양군 은 한국전쟁으로 치열한 격전장의 한가운데 놓여있었으며 종전되면서 5년 2 개월만에나머지 행정구역이 수복될 수 있었다. 아울러 1954년 11월부터 실 시된 미군정으로부터 3년 4개월 만에 행정권이 이양되었다. 양양군은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행정수복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15. 전후복구사업 기념탑 (독립문, 공병문)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25-1 현산공원 내 16. 이광재신부(디모테오)순교 기념비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1 양양성당 내 이탑은 6.25동란당시 제 1101야전공병단이 1951년 6월부터 1954년 11 월까지 양양지역에 주둔하여 전쟁임무를 수행하면서 양양군청 양양국민학교 양양교 등 전후 복구 사업과 지역개발 주민구제등 대민지역사업을 적극 수행 하므로서 전화의 실의에 빠져있던 우리 양양군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을 기념하기위하여 당부대가 1953년 10월에 양양 4거리에 이탑 을 건립하였고, 1974년 7월에 양양교 서쪽 제방으로 이전하였고, 2008년 7 월 도로확장에 따라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이광재 신부는 양양성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함흥,원산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본당을 거쳐 남하 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 와주었다. 그러던 중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춘천교구 소속 본당으로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에 소재해있다. 1921 년 5월 5일 내평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 수의 성녀 데레사이다. 관할 구역은 양양읍, 서면, 손양면 현북면 전 지역과 현남면, 강현면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현북 1개소이다. 양양 지방의 전 승에 따르면 병인박해 떄 충북 제천의 배론 교우촌에 고주하던 ‘이 베드로’가 양양면 화일리의 범뱅이골로 피신해 오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베드로’의 동생 ‘이 바오로’와 김덕수, 그리고 김덕수의 숙부가 범뱅이골 로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다른 전승은 양양 인근에 있는 속 초의 싸리재에 관한 것으로, 충청도 청주에 살던 오광선이 병인박해를 피해 강릉 홍제동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맏아들 오춘영(바오로)이 속초 도문동으 로 이주하여 ‘싸리재 옹기점’을 일구었다고 한다. 범뱅이골과 싸리재는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였다. 출처: 김성희, 한국가톨릭대사전 제 9권 39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