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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은 선조들이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는 동안 후손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쏟아온 곳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구국의 일념으로 10화운동이 일어나니 진리에 명덕 북리에 평신 서포리에 함일학교를 각각 세워 새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강토가 일본의 총칼 앞에 짓밟히자 9년 후 기미년 3월 1일은 겨례가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독립만세의 함성이 강산을 뒤흔들때 명덕학교 임용우 선생은 그해 3월 고향인 김포 월곶에 가셨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는 몸으로 덕적에 돌아와서 제자인 함일학교 선생 이재선(당시 23세) 차경창(당시 19세)와 함께 만세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4월 9일 진리 송정에서 명덕 명신 함일학교의 연합운동회를 마친후 모인 200여 문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재관 선생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다음 각 마을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또 만세를 불렀다. 그 여파는 문갑과 울도에까지 미쳤으며 겨례의 정당한 주장을 장열히 외쳤다. 4월 중순 덕적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신 김용우 이재관 차경창 선생이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된 후 임용우 선생의 신병인도 연락이 있어 그 제자들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5월 10일 모셔오니 체포된 지 불과 20여일 만에 잔혹한 고문으로 35세에 망국의 한을 품은채 순국하셨으며 재판 결과 임용우 선생은 사후 판결로 1년 6개월 이재관 차경창 두 선생은 각 8개월 형의 옥고를 치르시게 되었다. 이제 기미3.1독립만세 60주년을 맞아 면민 일동은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에 비를 세워 선현들의 애국행적을 되살리고 후손들에게 길이 이 높은 뜻을 전하기 위하여 그 사실을 여기에 새기노라. 1979년 4월 9일 덕적면민 일동 덕우회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