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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 포구로 넘어왔다. 포구 입구 백령도 서북쪽 서해 군사분계선 남쪽 4마일 해상에서 1970년 7월 9일 밤 11시경까지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두무진 어부들은 갑자기 나타난 북한 함정의 돌발적인 총격에 의하여 어선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때 북한의 악랄한 만행을 잘 아는 실향민 어부들은 끌려가지 않으려 뱃줄을 끊고 도망하려다가 그 중 만복호(萬福號) 어부인 최상일(崔相一)은 그들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7톤급 어선 무진호 어부 최춘빈(崔春彬), 민경신(閔庚信), 변호신(邊浩信)과 만복호 어부 사명남(史明南) 등 4명은 놈들에게 끌려가서 악행을 당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각오를 하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들은 전에 한번 끌려가서 갖은 악행을 다 받고 풀려나서 살아 돌아온 어부들이기 때문에 이번에 또 끌려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끝에 몸을 바다에 던져 죽고 말았다. 이 때 할 수 없이 북으로 끌려갔던 어부들은 9개월간 억류되어 갖은 고문과 죽을 고생 끝에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 동안 끌려가다가 물에 빠져 사망한 4명에 대한 일도 이 곳 두무진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여 1970년 7월 9일 밤 11시경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끌려가다 놈들의 총에 맞아 죽은 최상일의 시체도 놈들이 바다에다 던져 버렸는지 그대로 싣고 가서 묻어버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4명의 시체도 종래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북한의 만행을 주검으로 항거한 백령도 두무진 어민들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1년 백령도어업조합 조합장 장익보(張翼甫)씨가 두무진 분교 옆산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때 장익보 조합장은 비석에다 비문을 새기지 못한 것을 영령들에게 죄송하게 생각되어 1979년 사재를 털어 위령의 비문을 새기고 자리를 옮겨 두무진 해안 마을 입구에 세웠다. 그 후 1987년 6월 30일 이 곳 어촌계 선주(船主) 14명이 사재를 들여 현재 규모의 위령비를 다시 세웠다. 나름대로 죽은 영혼에 제사 또는 그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여 위로의 뜻을 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옹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