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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 25일 함경북도 부녕에서 출생한 강문봉은 부친이 만주에서 은행장을 지냈을 만큼 부유한 가정에서 동 시대의 또래들과는 달리 윤택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신경제일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국의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그는 광복군 출신의 오광선이 광복군 국내지대장으로 임명되어 동대문 밖에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독립지사를 비롯한 건실한 청년들을 모집, 시내 각 중요 처소에 대한 경비에 임하자 “광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편성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제2중대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던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17)로 임관한 그는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으로 전보되어 연대창설에 참여하였고, 3개 중대의 대대편성이 완료된 후에는 백인엽 참위(소위)에 이어 대대 부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3월 1일 육군 대령으로 진급될 때까지 총사령부와 육군참모학교 등에서 근デ臼눗? 전쟁발발 보름전인 1950년 6월 10일에는 육군본부 작전국장에 임명되어 6.25전쟁을 맞게 된 강문봉 대령은 전쟁 초기 정일권 참모총장을 보좌하여 전국을 수습하는데 주력하였다. 1951년 4월 6일 제1사단장에 임명되어 중공군 제5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휴전을 맞은 장군은 10월에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후 계속하여 제3군단장으로 재임하다 다음해 8월 제2군사령부 창설위원단장으로 임명되어 군사령부 창설에 주력하고 10월 31일 제2군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재임 중 1956년에 발생한 ‘김창룡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다가 4.19혁명 이후 석방되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제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1971년 주 스위스 대사 및 바티칸 대사를 지내고, 1973년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제9대 국회에 등원하였다. 그러나 1975년 ‘정일권 대통령 추대 혐의’로 체포되어 지병인 폐암을 얻은 그는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월터리드 육군병원 등 유명한 암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1988년에 향년 66세를 일기로 한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보기 드문 지장으로 지혜가 넘치고 인간미가 풍성한 삶의 소유자였지만 정치권에 가까이하면서 실패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 강문봉에 대해 많은 선후배 군인들은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특히 그의 사건과 많은 연관이 있었던 박정희대통령마저도 “이 사람이 참모총장이 돼야 하는데..”라고 아쉬워하며, “강 장군은 위대한 군인이며 한국의 육군참모총장이 되어야 할 인물이야”라고 누누이 말하곤 하였다. 그는 군내에서 명석하고 강직해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으며, 매사가 맵고 확실하였다. 또한 끊임없는 독서와 1963년 미 조지워싱턴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풍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태릉의 군사영어학교 시절부터 통역을 전담할 정도로 어학 실력도 수준급인 학자풍의 지휘관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나는 왜 사형수가 되었는가'가 있다. 출처 : 전쟁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