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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취지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외세 침입에 약소국의 비애를 절실히 느낀다. 일제의 36년간 식민지 치하에서 1945년 해방은 되었으나, 조국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 아름다운 조국강토는 완전히 유린되었다. 이곳 가회지역도 한국전쟁의 거센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 인민군은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여 UN군 비행단의 공습을 피해 서부경남 산악지대로 후퇴하였고 당시 이 지역은 대부분 해방 후 좌.우 대립이 극심한 곳이었으니 가회지역은 예외였다. 1950년 12월경 북진하는 연합군을 거슬러 남하하던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 850명은 속리산 추풍령을 지나 1951년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 거점을 잡고 이현상 주재하에 남한 전역 남부군(빨치산) 조직 체계를 영웅칭호를 두번이나 받은 빨치산전투의 베테랑, 인민군 박종하(제2병단 시절 7연대장)가 보임되었다. 남부군은 황석산, 덕갈산을 거쳐 1951년 8월 10일경 황매산에 이르렀고 동일 고요하고 평화로운 우리고장 가회지서를 습격하였다. 습격부대는 남부군 3개부대, 전북 720부대, 충남 인부대와 붉은별부대, 315부대와 산청, 함양, 거창 유격대가 주력인 총 700명이 동원되었다. 경찰, 향토방위대는 똥뫼산(독뫼산)으로 후퇴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경찰 10여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포로(경찰 측 기록 56명)가 되었다. 가회전투에 국군 제1비행단이 출격, 엄호하자 남부군은 포로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은 후 모두 석방시켜 주었다. 경찰과 방위대도 상당한 대비가 있었던 만큼 피복,식량,무기 등 노획품도 많았다. 피복은 남부군 전체가 새 단장하고도 남았고 60밀리 포탄은 700명이두 개씩, 수류탄 5~6개, 쌀 두세 말씩, 총탄 30만 발이었다.박종하는 똥뫼산(독뫼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차황면 입석에서 사망했다. 가회면사무소, 가회지서는 물론 잔여 물자를 모두 불태운 후 황매산으로 철수했다. 남부군이 토벌 섬멸될 때까지 수많은 전투 중 가회전투가 남부군의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기록된다. 이후 남부군은 하동, 운봉전투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700명의 남부군이 300여명도 채 나지 않았다. 남부군이 끝까지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가회전투에서 노획한 물자가 원동력이었다. 가회면민은 좌우갈등이나 이념적 관계를 초월하여 이해와 화합, 애향심으로 안정을 되찾고 다음을 대비했다. 해방 후 좌우갈등과 민족동란을 통틀어 가장 모범적인 현대사의 산 현장이고 모범적인 사례다. 이제 우리는 그날의 참상을 상기하고 참전했던 경찰,향토방원대원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산화하신 영령의 명복을 빌며 후세에게 나라사랑과 향토 사랑의 귀감으로 삼고자 가회전투 66주년을 맞아 평화통일과 번영의 시대가 열리기를 염원하고 온 면민의 뜻을 모아 여기에 가회전투 전적비를 세운다. (참고문헌 이태 남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