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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지사는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다. 1873년에 영양 지경리에서 통정대부 정한공의 따님으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며 성장했다. 김영주에게 출가하여 초년부터 부덕을 쌓아 효부상을 받았고 1896년 부군이 의병전선에서 전사하자 계몽운동으로 민족운동가의 역량을 키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복자를 데리고 시댁 친족이며 서로군정서 참모장인 김동삼을 찾아 만주로 들어가 여성 독립운동가의 길을 개척하였다. 여사는 만주에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재만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하고 동포촌락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계몽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20년 8월 29일 국치기념대회에서는 혈서로 연설문을 작성하여 독립운동의 기상을 높였고 그 해 10월 청산리대첩에서 부상한 독립군을 겨울 내내 간호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5년에는 정의부 인사가 모인 길림으로 옮겨 손정도 목사와 함께 선교활동과 민족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7년에는 김동삼․ 안창호와 더불어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다가 길림의 안창호 연설장에서 47명의 독립지사가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 때 여사는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 당국에 교섭하여 전원 석방된 쾌거를 올려 여사의 명성은 중국 사회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국제연맹 조사단이 봉천에 올새 여사는 왼손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전달함으로써 독립의지를 국제적으로 선양하였다. 1933년 3월 1일 괴뢰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일제의 武藤信義(무등신의:무토 노부요시) 전권대사를 폭살하는 준비를 진행 중에 합이빈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여사는 일제의 영사관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경이 되어 보석되었으나 환갑을 앞둔 8월 22일에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순국하였다.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에서 여자라도 강인한 정신이면 이겨낸다는 교훈을 청사에 남겼다. 나라에서도 여사의 정신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