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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순봉 의사는 1903년 광무 7년 계묘에 영양 대천 옥산리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형순이고 순봉은 아명이다. 호는 가을 나무들처럼 자기 분신인 낙엽으로 세상의 거름이 된다는 뜻으로 추수라 했다. 1925년에 만주 해림으로 망명하여 때마침 창립된 김좌진 신민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1903년에는 한족자치연합회를 조직하고 청년부를 맡아 재만 한인의 무정부주의운동에 이바지하였다. 무정부주의는 제국주의도 어떤 권력통치도 없는 인류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김좌진, 김종진, 이준근, 김야운, 이회영, 신채호 등의 무정부주의자가 일제의 주구배에 의해 암살 또는 체포당하자 1931년 의사는 상해로 이동하였다. 거기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에 가입하여 유자명, 정화암, 유림, 이을규, 백정기, 이달, 원심창, 이강훈, 이규창 등의 동지와 함께 활동하였다. 흑색공포단은 일본 제국주의자와 그의 주구배 소탕을 위하여 결성한 의열투쟁 단체였다. 상해의 군사시설을 폭파하고 이종홍, 옥관빈, 옥성빈의 처단이 그의 초기 성과였다. 1933년에는 일제의 有吉明(유길명:아리요시 아키라) 공사를 처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5년 3월 25일에는 상해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하여 민족적 경각심을 드높였다. 이용로 처단은 엄형순 의사가 이규창(호) 의사와 함께 단행하였다. 처단한 뒤에 불의의 습격을 맞아 홍구 골목에서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1938년 4월 9일 일제의 형장에서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이규창이 지은 연명의 여신이란 책에 엄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행동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의의 행동이요 전세계 피압박민족을 대표한 자유 평등의 이념적 행동이었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고 전했다.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영광이 있다는 표본을 엄 의사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의사의 공적을 기려 나라에서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