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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방산 허훈은 일찍 공에게 위국간성지재가 될 것이니 자중자애하라고 이른 바 있다. 1905년 왜제는 을사보호조약이란 미명으로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니 보국 민영환, 향산 이만도 양선열들이 연이어 비분 자결하는 와중에서 공은 최후까지 항전보국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하순에 의병활동에 있어 천혜의 요쇄인 청송 주왕산에서 내산 이현규 의사와 함께 구국 격문으로 모병하니 500여명의 애국 장정들이 운집하여 우리의 의병부대가 편성되었다. 1906년 병오 2월에 위 부대의 도포장에 피선되고 청송, 영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선전하였다. 특히 같은 해 4월 상순 진보 오누지전투에서 일본군 헌병 오장인 무등부대와 접전하여 무등이하 적 사살 10여명의 대첩을 거두었다. 격전에서 불행히 공은 전상을 입게 되었으나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같은 해 5월 울진 죽변과 왜관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영양군 입안면 교동에서 잔류병력을 재규합할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의병을 재훈련 중 일본군부대에 포위되었으나 뛰어난 용병술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추격하는 일본군에 고전하였다. 1907년 정미 11월 21일 태백산맥의 고산준령인 안동군 임동면 대곡동 장갈령전투에서 수일간의 교전 끝에 우세한 적 병력의 집중화공에 장렬히 순국하니 향년 30이었다. 국가는 공의 혁혁한 공훈을 기리어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간산 정만현의 문집 중에 학남 김대규 의사전과 한국독립운동사에 각 등재된 관계문헌 사료를 보고 공의 위국충절에 감복하여 위와 같이 기공을 약술하고 이에 명하노니 태백산 정기받은 절세의 항일투사 내 한몸 초개같이 나라에 바쳤다오. 청사에 빛난 공적 오늘의 우리 광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