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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매 몸과 마음을 조국독립의 제단에 바치는데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전역에 만세운동의 봉화가 타오르게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3일 해평면 산양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는데 경북의 3.1운동불은 꺼지는 것 같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조선인 관리가 일인에게 협력하는 사람에게는 사직할 것과 협력을 중단하고 애국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도하자 일본경찰은 전국에 지명수배를 하니 6월에는 애국 청년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에 군사 교육을 시켜 군사 봉기를 계획, 추진하였다. 1920년 상주에서 체포되었으나 탈주에 성공하여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 최고정치회의에 최연소자로 참석하였다. 일본제국은 12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8년 형이 확정되었다. 1926년 중국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중국 길림성 목릉현 흥원진 한인 교회에서 동포들을 위해 헌신하던 중 대구 경북 개신교의 모교회인 대구 남성정 제일교회의 초빙을 받아 1931년 부임하였으며 문화재로 지정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