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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공)의 諱(휘)는 昇和(승화)이고 雅號(아호)는 碧松(벽송)이다. 迎日鄭氏(영일정씨) 三十世孫(삼십세손)으로 始祖(시조)는 高麗(고려)睿宗朝(예종조)에서 樞密院知奏事(추밀원지주사)를 지낸 顧託忠臣(고탁충신) 襲明(습명)이고, 累代(누대)로 家門(가문)이 빛났으니 六世(6세)의 宗興(종흥)은 進賢館(진현관) 提學(제학). 七世(7세)의 林(임)은 版圖判書(판도판서), 八世(8세)의 仁彦(인언)은 典工判書(전공판서)를 지냈다. 十一世(11세)의 傍先祖(방선조) 圃隱公(포은공) 夢周(몽주)는 그 忠節(충절)이 萬古(만고)에 빛난다. 朝鮮朝(조선조)에서도 九世(9세)의 光厚(광후)는 工曹判書(공조판서)이고, 公의 十八代祖(18대조) 從韶(종소)는 成均館(성균관) 司成(사성)인데 端宗復位檄文(단종복위격문) 初年(초년)의 忠節(충절)로 鷄龍山(계룡산) 東鶴寺(동학사) 肅慕殿(숙모전)에 配享(배향)되고 있으며, 十七代祖(17대조) 以僑(이교)는 弘文館(홍문관) 校理(교리)와 司憲府(사헌부) 掌令(장령)을 歷任(역임)하였는바 公의 金泉(김천) 入鄕祖(입향조)이다. 十六代祖(16대조) 公弼(공필)은 靈岩郡守(영암군수), 十五代祖(15대조) 昌武(창무)는 戶曹佐郞(호조좌랑), 十四代祖(14대조) 鼐臣(내신)은 秉節校尉(병절교위), 十三代祖(13대조) 維藩(유번)은 成均館(성균관) 大司成(대사성)을 歷任(역임)하였다. 그 後代(후대)는 크고 작은 벼슬이 이어지는 傳統的(전통적) 선비의 家門(가문)에서 西紀(서기) 一九二九年(1929년) 二月(2월) 二十七日(27일) 金泉(김천) 鳳溪(봉계)에서 出生(출생)하였다. 公의 祖父(조부)는 旴鎔(우용)이고 父親(부친)은 時永(시영)인데 忠節(충절)과 正義(정의)의 血統(혈통)을 이어 받았으니 公의 一生(일생) 또한 忠義(충의)와 剛直(강직)으로 지내다가 크나큰 災厄(재액)을 만나으니 하늘을 怨望(원망)할 것인가. 公은 一九四八年(1948년)에 靑雲(청운) 꿈을 안고 陸軍士官學校(육군사관학교) 第五期(제5기)로 任官(임관)하였고, 六,二五戰亂(6,25전란)에서는 戰線各地(전선각지)에서 死線(사선)을 넘는 赫赫(혁혁)한 戰功(전공)을 세웠다. 西紀 一九六一年(1961년)에 陸軍准將(육군준장), 西紀一九六七年(1967년)에 陸軍少將(육군소장), 西紀 一九七三年(1973년)에 陸軍中將(육군중장), 西紀 一九七七年(1977년)에 陸軍大將(육군대장)에 昇進(승진)되였으며, 步兵聯隊長(보병연대장),第二司令部(제2사령부) 作戰參謀(작전참모), 陸軍(육군) 防諜部隊長(방첩부대장), 陸軍(육군) 第七師團長(제7사단장), 陸軍本部(육군본부) 特戰監(특전감), 國防部(국방부) 人事局長(인사국장), 第一軍司令部(제1군사령부) 參謀長(참모장), 陸軍本部(육군본부) 企劃管理參謀副長(기획관리참모부장), 陸軍(육군) 第三軍團長(제3군단장), 陸軍士官學校長(육군사관학교장), 陸軍(육군) 第一司令官(제1사령관) 等(등) 要職(요직)을 歷任(역임)하면서 참다운 軍人(군인)의 길을 걸으며 德將(덕장)의 功勳(공훈)을 세웠다. 西紀 一九七九년(1979년)에는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에 補任(보임)되고 戒嚴司令官(계엄사령관)으로서 朴正熙(박정희) 大統領(대통령) 弑害事件(시해사건)이 일어나자 時局(시국)의 安定(안정)과 平和的(평화적)인 民主政府樹立(민주정부수립)을 위한 軍(군)의 政治(정치) 不關與(불관여)와 嚴正中立(엄정중립)에 渾身(혼신)의 努力(노력)을 기울였던바, 全斗煥一黨(전두환일당)의 下剋上(하극상) 軍事反亂(군사반란)으로 軍歷(군역)을 끝마쳤으니 國運(국운)의 탓이랄까. 公은 西紀 一九七九年(1979년) 十二월(12월) 捏造(날조)된 金載圭(김재규) 內亂企圖(내란기도) 幇助罪(방조죄)로 懲役七年(징역7년)을 宣告(선고)받고 三個月間(3개월간) 獄苦(옥고)를 치렀으나, 西紀 一九九七년(1997년) 나의 決心(결심)으로 全斗煥一黨(전두환일당)의 下剋上(하극상) 軍事反亂事件(군사반란사건) 再審(재심)과 倂行(병행)된 法廷再審(법정재심)으로 無罪(무죄)가 宣告(선고)되고 公은 完全(완전)히 名譽回復(명예회복)이 되었는바 그나마 平生(평생) 참다운 軍人(군인)에 對(대)한 慰安(위안)이 아니겠는가. 正義(정의)는 반드시 最後(최후)의 勝者(승자)가 되리로다. 西紀 一九八七년(1987년) 내가 統一民主黨(통일민주당) 總裁(총재)로서 第十三代(제13대) 大統領(대통령) 選擧(선거)에 立候補(입후보)함에 公이 나를 도와 民主政府(민주정부) 樹立(수립)에 寄與(기여)하고자 統一民主黨(통일민주당) 常任顧問(상임고문)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公은 나를 도울뿐 政治入門(정치입문)을 不容(불용)하고 오직 軍人(군인)의 名譽(명예)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을 뿐이었다. 아! 哀惜(애석)할 따름이다. 이 나라에 公과 같은 참 軍人(군인)이 많았던들 軍事(군사) 不法政權(불법정권)이 발붙일 수 없었을 터인즉 民意(민의)가 不義(불의)에 짓밟힌 일이 그 몇 번 이었던가. 공은 實(실)로 참기어려운 試鍊(시련)을 克服(극복)하고 떳떳한 참 軍人(군인) 陸軍大將(육군대장)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소. 西紀 一九九一年(1991년)에는 在京(재경) 金泉(김천)鄕友會長(향우회장)에 選任(선임)되여 在京鄕友(재경향우)들의 親睦(친목)을 보살폈고, 西紀 一九八四年(1984년)부터는 迎日鄭氏(영일정씨) 校理公派(교리공파) 大宗會長(대종회장)으로 宗事(종사)에도 큰 業績(업적)을 남겼으며, 西紀 一九九九年(1999년)에는 그 榮譽(영예)로운 星友會(성우회) 會長(회장)에 選出(선출)되여 社會理念(사회이념) 葛藤(갈등)에 正道(정도)의 빛이 되었으나 公의 役割(역할)이 더욱 期待(기대)되던 터에 公은 이미 病魔(병마)에 시달렸으니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있을건가. 西紀 二千二年(2002년) 六月(6월) 十二日(12일) 나는 將軍(장군)의 靈前(영전)에서 너무나 많은 想念(상념)에 젓었소. 鄭將軍(정장군)! 많은 사람들 가슴에 羹牆(갱장)의 情(정)이 서려있는 가운데 公은 眞正(진정)한 歷史(역사)의 勝利者(승리자)가 되었소. 그리고 公은 어제도 軍人(군인)이었고, 오늘도 내일도 軍人(군인)일 뿐이었으며, 公은 다시 태여 나도 그 榮光(영광)스러운 大韓民國(대한민국) 軍人(군인) 길을 갈 것이요. 鄭將軍(정장군)! 公은 외롭지 않소, 公이 사랑하는 夫人(부인) 申有慶(신유경)女史(여사)와 아들딸 弘烈(홍열),態然(태연),易烈(역열),嬉姃(희정)이 있고, 公은 尊敬(존경)하는 後輩軍人(후배군인)들, 그리고 우리가 있음에. 이제 在京(재경)金泉鄕友會(김천향우회)와 迎日鄭氏(영일정씨) 校理公派(교리공파)大宗會(대종회), 그리고 鳳溪(봉계) 大同會(대동회)에서 뜻을 모아 桑梓(상재)에 將軍(장군)의 懿績(의적)을 기리고자 함에 公의 長男(장남)弘烈君(홍열군)이 나에게 請文(청문)하니 公과의 情義(정의)로 辭讓(사양)하기어려워 深量(심량)하니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戰史(육군전사)와 公의 自傳(자전) 等(등) 史料(사료)에 依(의)한 詳錄(상록)이 있으니 要言不煩(요언불번)의 心情(심정)으로 公의 行狀記錄(행장기록)을 남기면서 遺德(유덕)을 追慕(추모)하고 後世(후세)들의 龜鑑(귀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서기 2004년 월 일 大韓民國第十四代大統領 金泳三 撰( 대한민국제14대대통령 김영삼 찬) 昌原后人 竹峰 黃晟現 書(창원후인 죽봉 황성현 서) 在京 金泉鄕友會, 鳳溪大同會(재경 김천향우회, 봉계대동회) 迎日鄭氏 校理公派 大宗會 槿竪(영일정씨 교리공파 대종회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