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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지서 전투와 경찰관, 의용경찰대원의 용전분투 증산면은 수도산과 단지봉 등 고산준령으로 둘러 싸여 당시에는 교통마저 불편한 산간오지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좌우익으로 갈려 극심한 이념대립을 겪던 중 1948년 10월 1일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좌익계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속에 들어갔다. 이를 피해 좌익계 공비들이 달아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이때 이들이 택한 곳이 증산면 산악지대였다. 이들은 수도산 일대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수시로 관공서와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 19일 밤 12시, 공비 20여명이 증산지서를 습격하여 지서장 최판산 등 경찰관 4명이 전사하고 지서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증산면 청년들이 의용경찰대원으로 참전하여 공비 12명을 사살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 공비들은 북한군 패잔병이 합세한 1천여 명에 달하는 부대를 조직하여 '불꽃사단'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수도산과 삼도봉 일대를 장악했다. 불꽃사단은 증산면 유성리에 주둔하던 국군 제877경비대와 수시로 교전을 벌였는데 1950년 10월 24일 밤 12시, 증산지서를 습격해 지서장 이기식 등 경찰관 6명이 전사하고 11월 18일에도 경찰관 2명이 전사했다. 이후 군경은 1950년 11월 24일, 제877경비대와 특경대원, 의용경찰대원 등 200여명이 합동으로 새벽 4시를 기해 수도산의 적 근거지를 공격해 적 80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원 다수가 희생되고 말았다. 1951년 2월에도 불꽃사단이 증산지서를 다시 습격하여 순경 김시태, 최말술, 이복석이 전사했으며, 적군 상사 김덕순이 투항 귀순해 의용경찰대원들에게 사격술을 교육시키는 등 기여하다 전사했다. 1951년 7월 14일, 청암사에 적들이 집결해있다는 신고를 접한 김천경찰서에서는 경찰지원병 80명과 증산지서 경찰관, 의용경찰대원 등 120여명이 밤 11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10여명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당시 임시 증산면사무소로 사용 중이던 쌍계사 공비들의 방화로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도 증산지서 경찰관들과 의용경찰대원들은 공비 수색과 소탕작전에 참전하며 진정한 애국애족의 길을 몸소 실천했다. 증산지서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원들의 살신성인이 있었기에 환난의 위기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의 인위를 지켜낼 수 있었음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며 장렬하게 순국한 스물두 분의 애국애족 정신은 만세토록 우리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020년 6월 25일 김천재향경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