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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화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으니까 진정한 대한민국의 힘이 되어야 해요.” 힘겹게 해병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지금은 목사로서 복 음전도에 힘을 쓰고 있지만 인기가수 윤항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 록밴드라는 장르를 최초로 도입한 “키보이스” 의 멤버. 계보를 따져보면 아이돌 밴드인 ‘FT아일랜드’나 ‘CNBLUE’ 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전역과 함께 시작한 키보이스 활동에 대해 들 어보았다. “입대 전부터 미 8군에서 밴드를 하면서 드럼을 쳤는데 1963년에 전역하고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키보이스’활동을 시작했죠. 비틀스 를 롤모델로 한국에 도입한 록밴드였는데, 아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걸? 당시 한국 가요는 연주 자 따로 가수 따로였는데 우리는 연주하면서 직접 노래하는 그룹사 운드였으니까. 무대에 오르면 인파가 상상을 초월했어. 지금이야 인 기가수 물어보면 여러 가수가 나오지만 그때는 그룹사운드하면 우 리밖에 없었거든. 허허. 지역에 행사 가면 오픈카를 타고 퍼레이드를 했다니까. 지금 K-POP의 인기도 우리 그룹사운드 출신의 음악가들 이 이끌고 있다고 자부해요. 그들이 다 작사, 작곡가로 열심히 활동 하고 있잖아.” 그의 말대로 그는 최고의 대중가수였다. 1977년에도 그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방송국을 돌며 노래를 불렀 고, 밤에는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으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쓰러졌다. 폐결핵 말기였다. “60년대 후반에 위문단으로 월남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내 생각에 거기서 너무 고생을 한 탓인 거 같아. 그 무더운 나라에서 헬기를 타 고 이동하며 하루에 3~4회 공연을 2년간 했으니까. 정신은 해병대 특 유의 깡으로 버텼는데 몸은 못 버티고 무너진 거지.”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인기 절정의 상태에서 받은 폐 결핵 말기의 진단. 그는 시한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푸라기 총장 집무실 한 켠에 가득한 상패와 책은 식지않는 그의 열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