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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 태릉선수촌장은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시간을 쪼개 가며 선수촌 구석구석을 훑는다. 현장이 최고고, 선수촌장은 선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잰 걸음으로 선수들 사이를 누비는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 아늑한 선수촌에 자리잡은 촌장실에서 만난 박종길 태릉선수촌장은 약간만 과장해서 말하면 여전히 현역선 수의 느낌이었다. 혈기 넘치는 얼굴, 당당한 체구, 그리고 그를 아시 안게임 3연패로 이끈 투박한 손. 그 어느 것 하나도 은퇴한 선수로 보 이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한국 스포츠사에 중요한 포인트다. 공산권 국가로 국제 스포츠대회에 참가하지 않던 중국과 북한이 등장한 것이다. 북한은 대한민국에 이어 금메달 1개 차이로 5 위에 올랐고 남과 북은 이때부터 스포츠를 통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 게 된다. 당시 아시아선수권자였던 그는 이 대회 권총부문에서 내심 3관왕을 기대했지만 중국과 북한에 밀려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 는데 그쳤다. “해병대 장교가 적군에게 졌다”며 절치부심한 그는 이 후 아시안게임 3연패의 쾌거를 이룬다. 지금, 그 사격 전설과의 유쾌한 두 시간을 들어보자. “어딜 가도 내가 해병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빨간 명찰의 혼이라는 게 신기해서 지금도 흐트러짐이 없거든. 이 혼을 배 워오라고 난 복싱팀과 레슬링팀을 캠프로 보냈어요. 거기서 일장연 설을 했지. 기필코 해병혼을 몸에 가득 담아와서 어디 가서든 이길 수 있도록 하라고 하죠.” 첫 대면 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해병대 이야기부터 시작 한다. 해병대 출신임은 이로써 입증이 완료되었다. 그는 해병대 간부 후보생 41기로 입대해 김포 2사단에서 중대장을 지냈다. “옛날 선수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힘들 때면 항상 ‘내가 해 병대인데, 나 중대장 출신이야. 이것도 못하면 되겠어?’라고 생각합니 다. 그래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다고 자부해요. 당시 월남전이 절정에 있을 때라 사격훈련 비중이 엄청났어요. 소총 4주, 권총을 3주 훈련 했죠. 난 새벽구보를 소대원 전체가 크게 구령 붙여서 하곤 했는데 대 대장님이 내 구령소리에 잠 깬다고 하셨어. 열정적인 장교생활이었 죠. 후보생 1등, 초군반 1등한 것도 열정이었을 거에요. 난 머리보다 는 열심히 했거든요. 내 생활신조가 열정이니까. 하하” 그의 사격신화는 해병대 장교로 입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전혀 사 격과는 연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군사훈련을 통해 자신이 사격에 소 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운명과도 같이 전군사격대 회에서 우승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발탁되었다. 지금의 박종길을 있게 한 은인이 해병대인 셈.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 회장이 되더니 갑자기 아시아 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했어요. 근데 그때 한국 체육계에 인프라라고 있나. 서울운동장, 장충체육관, 동대문 아이스링크가 전부였거든. 70 년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었는데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포기 했을 정도였어요. 근데 덜컥 사격대회를 열게 된 거지. 선수가 있나.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각 군에 사격 잘하는 사람을 불러올린 거죠. 해 병대도 난리가 난 거죠. 전쟁준비로 정신이 없었는데 내가 거론이 된 거에요. 그때 나는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배 타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 었는데 전쟁보다 더 큰 국가과업이 있다면서 올라갔죠. 경찰도 있었 고 각 군에서 내로라 하는 총잡이들이 올라왔는데 내가 금메달을 땄 어. 그때부터 내 사격인생이 시작됐죠.” 훈련은 어떻게 했을까. 군대에서 과연 체계적인 사격훈련을 할 수 있었을까.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엄청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스스 로 열정이 생활신조라고 했던 것을 너무 간과했다. 해병정신과 열정 으로 가득한 그의 훈련일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Vol. 40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1 힘들 때면 항상 ‘내가 해병대인데, 나 중대장 출신이야. 이것도 못하면 되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다고 자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