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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마을 위령비 유래 백두대간 학가산 서록에 위치한 산성마을은 150호의 순흥안씨 집성촌이다. 일가붙이들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마을에 천추에 씻을 수 없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19일 오후 4시경의 일이었다. 갑자기 정찰기 2대가 마을 상공을 선회하고 지나간 뒤 미군 폭격기 6대가 나무토막 같은 폭탄을 투하하고 휘발유를 뿌리며 사라지자 마을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린 아이와 아녀자들의 비명이 계곡을 찢었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통곡의 바다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51명이 억울하게 죽었고 90여명이 중화상을 입었으며, 70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40여 두의 가축을 잃는 등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오호 통제라! 4백년을 이어온 아문(我門)에 닥친 그날의 처참한 비극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렵고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대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혹독한 시련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매서운 설한의 겨울, 섣달 열하루날 밤 스물넷 집에서 지내는 기제(忌祭)의 독축(讀祝)소리는 그날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처참한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국가적 차원의 보상이나 규명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에 1999년 10월 희생자 유족회(안태기, 안식모 외)를 구성한 후 이 억울한 사실을 언론에 알리는 한편, 대통령과 국방장관 등 관계 요로에 탄원을 하여 급기야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별다른 진전 없이 8년의 세월이 흐른, 2007년에서야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예천 산성동 미군오폭 사고」로 진실이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예천군에서 위령비를 세우고 제단을 마련한 후 희생자 명단을 새겨 위로하니 삼가 영혼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비석 뒷면의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