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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몽 채기중의사 비문 순국선열 항일의사 소몽 채기중선생의 자는 극오이며 관향은 인천이다. 고려조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의 28세손으로 1873년 7월 7일 이안면 소암리에서 탄생하였다. 의사는 출생직전 부친을 여의었으나 모친 곡부공씨와 장성한 형들의 보살핌으로 학문을 익히며 어려움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성품은 날카롭고 민첩하였으며 몸이 비록 장대하지는 아니하였으나 튼튼하고 순박하였다. 또 구김살 없는 기질에 늘 옛날의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 한다. 의사는 고향 이안면에서 유.청년 시절을 보내며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항쟁으로 이어지는 한말의 반외세투쟁을 경험하였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궐기한 동학의 불길은 이곳 상주까지 타올랐다. 이듬해는 명성황후의 시해로 폭발한 을미의병의 함성이 경북 북부를 뒤덮었다. 19세기 말의 이러한 민족적 위기와 저항을 체험하며 의사의 항일 민족정신은 공고해져 갔던것이다. 마침내 1905년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의사는 구국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풍기로 이거하였다. 국권회복의 염원을 품고 정든 고향을 떠나 연고없는 외지로 향하였으니 의사의 행로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서간도 벌판으로 떠난 한말 우국지사들의 그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풍기에 정착하여 암중모색하던 의사는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하자 1913년 전국의 지사들을 규합해 일제하 최초의 무장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게된다. 자신의 화신과도 같은 대한광복단의 결성과 함께 의사의 독립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가산을 방매하여 단원을 양성하였고 국경을 돌며 무기하여 장차의 투쟁에 대비하였다. 의사의 명성이 암암리에 퍼지자 국권회복의 대의를 품은 많은 애국투사들이 속속 대한광복단의 깃발아래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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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15년 박상진, 이관구, 김좌진등 당대의 민족지사들이 동지를 이끌고 합류하니 이 해 대한광복단은 대한광복회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이 후 의사는 박상진선생과 손잡고 팔도에 광복회 지부를 설치하여 일제의 세금 수송마차와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는등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또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 만주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수립하였다.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의사는 전국의 부호들에게 광복회를 지원하여 독립운동에 동참할것을 촉구하는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친일배들이 이에 불응하고 오히려 광복회를 위협하니 의사는 심판의 차원에서 이들을 응징할 것을 결심하고 1917년 11월 칠곡의 대표적 반민족 지주 장모를 직접 처단하였다. 이어 그의 죄를 묻고 동표의 각성을 호소하는 격문을 게시하여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천하에 선포하였다. 의사가 주도한 광복회의 친일파 처단은 이후 삼남을 휩쓸며 민족 반역자들에게는 공포를, 희망잃은 우리 민중에게는 용기를 불러 주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가 수사에 착수하니 1918년 광복회 조직은 발각되고 의사 역시 그해 7월 전라도 목포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경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의사는 "마땅히 죽을 때 죽는 죽음은 도리어 삶"이라는 의연한 절명시를 남기고 1921년 서대문감옥에서 광복회의 제단에 바친 48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잔악한 무단통치하에서도 꺽이지 않았던 구국의 정신과 살신의 기상은 해방의 순간까지 우리 겨레가 독립전쟁을 수행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으니 참으로 의사의 존재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의사가 가신지 여든네해를 보내고 광복 반세기가 지난 오늘 태어나 자라고 그의 민족혼이 숨쉬는 이곳 이안에 그 기상과 위업을 청사에 남기고자 후손과 시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