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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정오경 24가구 127명이 거주하던 이 곳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에 무장한 국군 70여명이 들이닥쳐 주택 전체에 불을 지르고 주민 전원을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바로 이 자리 두 곳에 모아놓고 미친 듯이 총격을 가하며 평화롭기만 했던 마을을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불과 한 두시간만에 마을의 집들은 모두 불탔고 남녀노유 구분 없이 마을 주민 86명이 이날 국군에 의하여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인근 주흘산에 숨어있는 수명의 빨치산을 토벌하러 가던 국군 제3사단 25연대 7중대 예하 3소대와 3소대 장병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느닷없이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국군이 왔는데도 반겨주지 않는다는 등 자신들에게 대접이 소홀하다는 것을 트집잡아서 아무런 죄도 없는 순박한 민초들에게 빨갱이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그토록 잔인하게 학살했다. 천인이 공노하고도 남을 국군의 만행으로 저질러진 이 기막힌 「석달동 주민 집단대학살사건」은 사건 발생 3주 후 국방부장관이 현지에 와서 사실을 확인하고 유족들을 접견하여 위로금까지 전달했었지만 정부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사건 발생 2개월 후에 정리된 피학살자들의 호적부에는 사망원인을 공비들에 의해 총살되었다고 아예 왜곡해서 기록한 채 지금까지 은폐시키고 있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미증유의 대 사건이다. 4.19혁명 직후 국회조사단이 현지를 방문하여 생존 유족들과 지방기관장들로부터 증언을 청취하고 학살 사실을 확인하여 해원 작업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5.16 군사 구테타로 이마저 무산된 이후 정부에서는 이 학살 사건에 대한 어떠한 진상규명 작업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배상조치는 물론 원혼들에 대한 위령사업조차 취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전시가 아닌 평시에 무고한 양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이렇듯 무참하게 유린당한 이 사건에 대한 구제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49년 12월 24일 이곳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국군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당한 주민 86명중에는 5세 미만의 유아 11명을 포함해서 12세 미만의 어린이가 26명이었으며, 5세 미만의 유아중에는 돌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갓난아이가 5명이 있었다. 의학박사이며 시인인 류춘도(75세)님께서 2001년 12월 24일 학살현장을 답사하며 이런 기막힌 사실을 처음 접한 후 크게 충격을 받고 특히 부모와 함께 학살된 이름도 없는 가엾는 아기혼들을 생각하며, 이들 어린 원혼들을 달래는 시를 지어서 다시는 이 땅에 공권력에 의한 이같은 광적이고 야만적인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후세인들에게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을 남겨주기 위한 교훈을 삼기 위하여 두 번째 학살현장인 이곳에 이 시비를 세운다. 서기 2002년 12월 24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성공회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동춘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