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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손 한번 얹으시고 "예수 믿고 천국가거라"고 전도했던 아이가 지금에 예수를 믿어 권사가 되었노라고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만큼 성령의 불을 품고 다녔던 복음전도사였다. 일제시대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배단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경방단(당시 일제의 후방 치안담당기관)에 넘어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문전도사님은 6.25가 나던 그 해에 증도에 들어온 공산군들에 의해 목포로 끌려가서 죽음의 고비를 맞았으나, 국군의 상륙소식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증동리로 돌아오려하자, 고 이성복목사님이 구약성경 이사야서 26장20절 말씀인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를 뿌리친 채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타고 갔던 풍선(돗단배)을 다시 되잡아 타고 증동리로 돌아왔다. 그 후 1950년 10월 4일 저녁에 공산군이 다시 지도로 압송한다고 하며 여기 터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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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문준경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은 섬 선교의 어머니이며 성결의 신앙을 지키려는 성결교회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891년 2월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출생하여, 1908년 3월 현 신안군 증도면 등선리 정씨가문으로 출가하였다. 그후 1927년 故이성봉복사님이 시무하던 목포 북교동교회에 입교했으며 1931년 5월 서울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복음 사역자로 첫발을 내디는다. 1933년 임자 진리교회의 개척을 시작으로 그 이믇해인 1935년 증동리교회를 개척(1935년부터 순교시까지 시무했음)하였고 쉬지않는 걸음으로 대초리교회와 방축리 기도처(현 방축리교회)를 1936년에 개척하였으며 그 후, 우전리교회와 사옥교회를 개척하고 병풍교회는 순교기념교회로 세웠다.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문 전도사님은 나룻배를 타고 무안군(현 신안군)의 21개 섬들을 순화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개척의 불길을 지폈다. 1년에 고무신 아홉켤레가 닳아 없어졌다는 일화는 문전도사님이 전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