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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주력 부대를 편성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총기와 화약을 모아 무장하고 경부 철도와 일군 시설(一軍施設)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장차 경성으로 진격, 통감부에 육박하여 전 외국인을 척퇴(斥退)시키려는 웅대한 포부 아래 투쟁하였다. 이들의 총병력은 알 수 없으나 빈번한 이동과 합류 등으로 추정하여 상당 인원수의 부대 편성이 있었던 듯하고, 2차에 걸쳐 20리의 지점에서 일ㆍ관군(日ㆍ官軍)의 척후대(斥候隊)를 괴멸시켰으며, 다음으로 경부 철도 파괴, 열차 전복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황간 일대의 전 주민들의 전폭적인 자진 협력을 받았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전투를 전개할 수 있었다. 또한 상촌면 직평과 같은 지리적인 요충지를 전략 기지로 채택한 것은 노응규의 전략적 대안인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1907년 1월 21일(양력), 장차 경성진군을 계획하고 있을 때, 밀정에게 그 기밀이 누설되어 그의 수뇌 참모진과 더불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경성 경무 감옥소로 압송되어 검사의 엄중한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그의 의절을 빛내었다. 동지들이 차입(差入)해 주는 사식(私食) 이외는 일체의 관급식(官給食)을 거절하였다. 2월 4일 발병하여 옥에 갇힌 지 1개월도 못되는 그해 2월 16일(음력 1월 4일)에 순국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암 노응규의 의병 활동은 47세의 일기로 종지부를 찍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을 추서하였다. 그의 우국충절의 정신을 받들고 그 공을 후손만대에 기리고자 군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