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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器)를 싣고 이백여 리 떨어진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수부(首府)인 진주성(晋州城)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관리 수삼 명을 살해하였다. 이를 본 관찰사 조병필(趙秉弼), 경무관 김세진(金世鎭) 등 관리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를 목격하고 전해들은 진주 부민(府民)들은 뒤따라 봉기하여 정한용(鄭漢鎔)을 진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노응규 의병 부대는 성내에 포진하고, 정한용 의병부대는 성외에서 포진하게 되었다. 이어서 전 찰방 오종근(前察訪吳鍾根)·전 수찬 권봉희(前修撰權鳳熙)·노유 정재규(老儒 鄭載圭)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여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의병장 노응규는 문인 정한용과 함께 국왕에게 창의소(倡義疏)를 올려서, 이번 창의의 불가피함을 강조하고 앞으로 국왕을 위해 몸바칠 새로운 결의를 피력하였다. 또한 사방에 격문(檄文)을 돌려 민중들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니 십여 일에 수천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대구 관찰사 이중하(李重夏)는 도망 온 진주 경무관 김세진을 시켜 남영병(南營兵)을 이끌고 진주 동북방 약 70리 지점인 의령(宜寧)에 포진케 하였다. 노응규는 서재기와 오종근을 보내어 이를 격퇴시키고, 진주 참서관(參書官) 오현익(吳顯益)과 정탐꾼 몇 명을 잡아다가 목베었다. 진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진주 의병부대는 3월 28일(양력) 일제의 침략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기 위해 의병 부대의 별군을 진주에서 김해로 이동 집결시켰다. 이때 수천 명의 김해 민중들이 적극 호응하였지만, 일본군측은 정보를 수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의병부대를 먼저 공격해 온 일본군을 맞이하여 4월 11·12일(양력) 양일간에 걸쳐 김해 평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부산항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한편 진주성을 다시 관군에게 빼앗겼다. 그것은 일신의 안위와 영달(榮達)에만 사로잡혔던 정한용이 관군과 결탁하여 의병을 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한용은 노응규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훼척(毁斥)하였고, 안의의 서리배(胥吏輩)와 연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재기를 우선 사계(詐計)로써 살해한 다음 그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70노령의 노응규의 부친과 노응규의 백씨(伯氏)인 노응교(盧應交)마저도 살육하고 그 가산을 적몰(籍沒)케 하는 등 노응규 일족을 거의 멸문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이에 노응규는 변성명(變姓名)하고 호남 지방으로 피하여 광주의 종가 노종룡(盧鍾龍)을 찾아 그곳에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더불어 시세의 일비(日非)함을 개탄하기도 하고 유리 방랑하다가 순창(淳昌)의 이석표(李錫杓)의 집에서 외로운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7년 가을 노응규는 상경하여 판서 신기선(判書 申箕善)의 주선과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의 입품(入稟)으로 궐내에 들어가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렸다. 이로써 황제의 우비(優批)를 받아 살육당한 부모의 상장(喪葬)을 모실 것을 허락받았으나 안의의 이배(吏輩)들은 그것을 방할 뿐 아니라 노응규마저 살해하려고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899년 3월 19일에야 부모의 상장을 모셔 그의 한을 풀게되었다. 1902년 10월 규장각(奎章閣) 주사(主事)로 서임을 받고(判任官, 6等), 11월에는 경상남도사검겸독쇄관(慶尙南道査檢兼督刷官,9品)에 임명되고, 11월 6일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서임되어 주임관(奏任官) 6등에 올랐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될때까지 동궁 시종관(東宮 侍從官)의 중책을 맡아 시종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노응규는 단연 관직을 버리고 거의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이때 고종은 그에게 비밀히 시찰사(視察使)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그의 거의를 고무하였다. 먼저 노응규는 노공일(盧公一)과 더불어 광주의 노종일을 찾아가 그곳에서 재기(再起)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거병의 뜻을 밝힌 바 있는 면암 최익현의 막하로 달려가 그를 모시고 기병 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06년 6월 4일(음력 윤4월 13일)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수백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구국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담양을 거쳐 순창에 이르렀을 때, 출동한 일군의 탄압으로 면암을 비롯한 13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해산의 비운을 면할 수가 없었다. 노응규는 노공일과 더불어 그의 향리인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 용배동(梨房面石里龍背洞)으로 피신, 재거의(再擧義)할 준비를 하였다. 1906년 늦가을 충청ㆍ경기ㆍ전라 3도의 분기점은 충북 황간군 상촌면 물한리 직평(黃澗郡上村面勿閑里稷坪)으로 들어가 다시 구국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노응규 통수(統帥) 아래 중군장 서은구(徐殷九;前參奉), 선봉장 엄해윤(嚴海潤), 종사 노공일, 수종(隨從)에 김보운(金寶雲)ㆍ오자홍(吳自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