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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대첩 작전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남침을 가해왔다. 치열한 지연전을 거듭하면서 철수하였던 아군은 그 해 8월 낙동강에 囗자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미군은 마산지구에서 제25사단 현풍지구에 제 24사단 왜관지구에 제1기병사단이 배치되었고 국군은 다부동지구에 제1사단 신녕지구에 제6사단 영천지구에 제8사단 기계.안강지구에 수도사단 포항지구에 제3사단이 배치되어 이때부터 조직적인 방어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방어선이야말로 아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부로였다. 전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중 다부동방면 돌파에 실패한 적은 화급히 공격방향을 영천으로 바꾸었다. 영천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대구 경주와는 30km내외에 위치하여 낙동강 방어선의 명줄과도 같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일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 영천, 포항을 연결하는 낙동강 전선의 유일한 보급로가 차단되고 아군 제1군단 제2군단이 분리되어 결과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은 붕괴되고 더 나오가 부산마저 상실되는 최대의 위기를 맞된다. 영천이 적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UN군은 부득이 한국에서 철수할 계획이 있었다. 1950년 9월 5일 새벽 적 제15사단은 증강된 5개연대로 전차를 앞세우고 제8사단 정면으로 주공을 지향하였다. 영천의 방어가 어렵게 되자 제2군단장 유재흥장군은 제7사단의 2개 연대와 제1사단및 제6사단의 각 1개 연대를 제8사단에 배속하여 긴박한 상화에 대처하였다. 제8사단장 이성가장군은 영천 북쪽에는 예하 21연대와 제6사단 19연대를 배치하여 적의 증원부대와 보급로및 퇴로를 차단케하였고 남쪽으로는 제7사단 5연대로써 아와리를 8연대로써 유토리 일대를 고수케하면서 반격하도록 하고 예하 16연대와 제1사단 11연대로 하여금 적의 주공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포항전선에 참전한 예하 10연대도 긴급히 원대에 복귀하여 이 작전을 가세하였다.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반격을 당한 적은 포위망 속에서 섬멸적인 타격을 입고 일부의 패잔병들만이 도주하였다. 아군은 마침내 영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아군은 10여일간의 필사의 공방 끝네 최소의 희생으로 마침내 9월 이전의 방어선을 회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인민군 3,800여명을 사살하였고 309명을 생포하였으며 전차및 장갑타를 비롯한 각종장비 2,500여점을 노획하였다. 영천대첩은 결과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하였으며 북진의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 이 전투야말로 국가의 운명을 건 결전이자 자유를 지켜낸 일전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은 9월 7일 및 9월 10일 2회에 걸쳐 제8사단 지휘소를 방문하여 예하장병들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였다. 김일성조차 영천전투의 실패가 패전의 요인이었음을 노동동 중앙위원회에서 자책하였다. 이 대회전 승리는 유재흥 군단장의 영단과 본 작전을 진두 지휘한 이성가사단장의 탁월한 지휘능력 그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용정분투한 장병들의 호국일념이 맞물린 결과라고 하겠다. 또한 UN및 한국공군의 대활약과 미 제1기병사단 전차소대의 도움도 있었기에 국면의 일대전환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 작전에 참가한 모둔 부대와 장병들의 전공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