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page


42page

울분을 참지못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당시 영남에서는 심산 김창숙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영남유림단을 결성해 삼일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파리장서에는 선생도 서명했으나 심산이 젊은 사람들은 뒤에 더 큰 활약을 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다고 해 서명자 명단에서 빼게했다. 그 후 1915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청도의 이정희지사 경주의 박상진열사와 함께 지하독립단체를 만들어 독립투쟁을 했다.그리고 1919년에는 족제인 일몽 이수담열사가 활약하는 의열단을 지원하고 요원들을 피신시키는 연락책의 임무를 수행했다. 뒤에 이정희지사의 큰 딸은 박상진열사의 며느리가 되었고 작은 딸은 이수일지사의 며느리가 되었다. 제1차 유림단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선생은 1925년 9월에 심산을 중심으로 다시 신건동맹단을 만들어 군자금 모금책으로 활약했다. 자발적인 헌금도 받았지만 친일적인 부호로부터 강제로 모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6년 2월에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동지 40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그리고 1927년 5월에 심산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자 선생은 선생은 성주에서 피신해있다가 7월 26일에 부인이 산후통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본가에 들렀다가 잠복해 있던 칠곡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부인은 선생이 체포된지 3일만에 사망했고 박상진열사는 형장에서 순국했으면 또한 이수택열사도 옥고를 치룬 후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정희지사등 많은 동지들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이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계속 투쟁했다. 광복이 되자 선생은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김창숙선생이 결성한 전국유도회 영남지역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구미 동락 영주 소수, 선산 금호서원등의 원상과 당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대종교 영남지역 시교당의 초대원장으로 피선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