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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분연히 일어나시어 각지를 주유(周遊)하시며 일제의 만행(蠻行)을 샅샅이 살피시는 한편,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독립정신고취(獨立精神鼓吹)에 온 정열을 쏟으셨다. 1919년 기미(己未) 독립만세의 외침이 3천리 방방곡곡을 뒤흔들 때 17세의 어리신 몸으로 김익시(金益時) 최환화(崔煥和) 권성수(權星洙) 등 여러 동지들과 밀통(密通)하여 3월 14일 약목 장날을 맞아 맨 앞에서 목이 터지도록 독립만세를 외치시다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시어 모진 고문(拷問)을 받으신 후 춘추 어리신 덕으로 곧 석방은 되시었다. 1925년 2월엔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책 손병선(孫秉善)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중 손병선(孫秉善)이 체포되자 선생도 함께 체포되시어 2년간이나 모진 옥고(獄苦)를 치르셨으며, 1927년 정묘(丁卯) 4월엔 동지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신간회(新幹會) 칠곡군지부를 조직하시고 무산아동(無産兒童) 수업료면제, 한국인 본위의 교육실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에 의한 교육의 시정 등을 내걸고 약목공립보통학교의 학부형과 학생을 종용(慫慂)하여 동맹휴학을 결행하시려다 사전에 탄로(綻露)되어 일경(日警)에 체포되시니 이어 신간회(新幹會)도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1938년 3월에는 칠곡군독립건국위원장으로 암약(暗躍)하시다가 70여명의 동지와 함께 다시 체포되시어 또다시 4년간이나 미결수(未決囚)의 옥고(獄苦)를 치르셨으니, 전후 6여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선생의 국권회복의 의지는 더 한층 굳어지기만 하시었다. 선생께서는 늘 나라 없는 백성의 납세(納稅)는 부당하시다며 세원(稅源)인 전답(田畓)을 다 팔아 버리셨고, 나라 빼앗긴 민족이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시며 언제나 밖에서는 삿갓을 쓰시었으며, 한민족은 한복(韓服)이란 일념으로 살아 생전 양복(洋服) 한 번 입으신 적 없는 참 애국지사의 진면목(眞面目)을 드러내 보이셨다. 오호(嗚呼)라!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敗亡)을 눈 앞에 내렸으니 일제는 최후의 발악으로 전국에서 암약(暗躍)하는 애국지사에 대한 총검거령을 내렸으니 선생 또한 1945년 을유(乙酉) 8월 7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시어 경북 경찰부로 연행(連行)되시던 중, 더러운 왜놈의 손에 죽어 눈을 못 감기보다는 차라리 자결(自決)하리라 결심하시고 낙동강 철교(鐵橋)에 이르러 강물에 투신순절(投身殉節)하셨으니, 그 때 선생의 춘추 43세요 미망인(未亡人) 장윤계여사(張允桂女士)와 따님 네 분만을 남기시고 몽매(夢寐)에도 그리던 조국광복 또한 8일 앞둔 날이었으니, 이 어찌 슬프고 원통(寃痛)치 않으리요. 지금 선생은 비록 유명(幽明)은 달리하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