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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 영기 서린 금릉땅 봉계동에 한 여장부가 태어났으니 성은 창녕조씨요 이름은 윤남이다. 여사는 연산조때 무오사화에 연루된 매계 조위 선생의 후예로서 계대를 그곳에서 살아온 영남 명가의 따님이다. 애국애족과 단군성조의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키 위해 이 고장에 국조전을 창건한 아버님 용승과 어머님 이석련 사이에서 1914년 5월 16일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가훈을 몸소 익히는 한편 국권을 빼앗기고 온 민족이 설움을 당하는 것은 국민들의 무지와 무력 때문이란 것을 일찍이 깨닫고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여자의 몸이라도 더 배워 가정과 사회에 크게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 배화여고로 진학하여 재학중 광주학생사건에 동조하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짧은 기간이나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22세에 성산인 공조판서를 역임한 정헌공 이원조의 현손이며 홍문관교리 귀상의 증손인 손흥에게로 출가하여 평소 닦은 부도를 정성껏 다했으며 1946년 이곳 왜관으로 부군과 함께 이거하였다. 여사는 홍익인간의 숭고한 뜻을 펴는데 일생을 바친 아버님에게 감화를 받아 가난과 무지와 무력함을 숙명으로 알고 살던 당시에 이 지역사회의 여성의 선도자로 막중한 역할을 자임키로 결심하고 여성의 지위향상은 물론 국가 사회와 가정에 더 많이 이바지할 수 있도록 여성들을 올바르게 계도하는 한편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송죽부녀회 및 한국부인회 곡군지부와 적십자봉사 칠곡부지부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이 되니 회세가 날로 확장되고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1976년 조직된 사단법인 송죽부녀회가 1981년에는 사회부지법인으로 국가의 인가를 받아 법적 기반을 갖추었다. 1971년에는 회원들의 자진 협력과 대통령 하사금 및 각계의 도움으로 국내최초인 140여평의 2층 콩크리트 독립건물을 세워 여성들의 복지회관 겸 지역 주인에게 각종 편의시설로 제공하였으며 사재로 여성을 위한 노인정을 마련하여 기증하기도 하였다. 또 불우이웃과 불우청소년들에게는 장학금 지급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특히 이 지역의 특수성을 지닌 보호받을 여성들과의 상담활동으로 진로를 선도하는 한편 근검절약과 예절교육 및 장한 어머니 표창 등 누구에게도 아무런 바람없이 한결같이 베풀기만 한 이 장한 뜻이야말로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리라. 1986년 5월 5일 지역사회봉사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이 주는 국민훈장을 받았으며 그밖에 대구경북문화시민상 금상 상록수용신봉사상 자랑스런 경북인상 적십자 자봉사 2만시간 이상자 표창 등 각계로부터 받은 감사장 공로패 표창장 등이 30여종이 넘으니 남편에게는 열녀다운 부도를 다하면서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리고 한 평생을 살아온 여사는 실로 희생과 봉사의 화신이라 하리라. 세태가 급변하여 부도가 허물어지고 가치관이 혼미한 오늘날 우리 여성에게는 지행과 부덕을 겸비한 여사 같이 신념있는 지도자가 꼭 필요하나 희수를 맞아 모든 직을 사임하려함에 여사의 거룩하고 훌륭한 삶의 자취를 후세들에게 널리 알려 우리 온 여성의 귀감으로 삼고자 우리 회원일동의 이름으로 그 많은 공적 중 일부를 이 작은 돌에 깊게 새겨 오래도록 전하려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