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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의 인물 –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다 ▷ 고려시대 ▸김수(생몰년 미상) :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개성부윤을 역임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침입 때 이성계를 따라 공을 세워 해평군에 봉해지고, 조선 개국 후 예조판서에 올랐다. 도은 이숭인과 도의를 논하였고, 녹봉서당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지천면 창평리 법곡산에 묘소가 있다. ▷ 조선시대 ▸이서우(1584~1637) : 인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용양위의 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7년(인조 15) 1월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광주로 이동하여 쌍령전투에 참전하였다가 54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사후 공로를 인정받아 중훈대부, 군기시부정에 증직되었다. 지천면 연화리에 묘소가 있다. ▸신유(1619~1680) : 1645년(인조 23)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북도 병마우후 등을 역임하였다. 1658년 제2차 나선정벌의 영장이 되어, 북병영의 정예포수 200여 명을 이끌고 만주의 흑룡강 으로 출병하여 러시아의 스테파노프 부대를 격파하였다. 저서로는 나선정벌 기록인 『북정일기』가 있으며, 약목면 남계리에 사당과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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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칠곡 출신 독립운동가 ▸장석영(1851~1926) : 기산면 각산리에서 태어나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될 때 칠곡지역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발송하기 위하여 전국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를 초안하고, 성주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원형(1862-1914) : 지천면에서 태어나 1890년(고종 27) 별시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전후 세 차례의 구국상소를 하였고, 13도 유생의 연명소를 올리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국권피탈 이후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 회복을 모의하던 중 분사하였다. 지천면에 의사비가 있으며, 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진홍(1895~1930) : 인동면 문림리에서 태어나 인명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27년 경북도청과 경찰부,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대구지점의 폭파를 계획하였고,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폭탄을 배달하여 은행을 대파하였다. 이후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다가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추적해 온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대구로 압송된 후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권쾌복(1921~2009) : 인동면 시미동에서 태어났다. 1941년 민족문화 육성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촉진할 목적으로 비밀결사인 '다혁당'을 조직하고, 타 학교 학생과 일반인으로까지 그 대상을 확대하였다. 1941년 7월 대구사범 학교 윤독회 간행물인 「반딧불」이 발각되어 체포된 후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후 광복회 이사와 제13대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