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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원에서. 조선시대까지 다부동고개는 문경새재를 거쳐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이어서 드나드는 관원들을 위해 院(원)이 설치돼 있었다. 驛(역)이 생기고 많은 관원과 행상인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면서 자연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이 때 돈많은 巨商(거상)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多富院(다부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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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富院에서 한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多富院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 마루에 뿌려져 있다. 彼我 攻防의 砲火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多富院은 이렇게도 大邱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自由의 國土안에 살리기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늘 말아라 이 황폐한 風景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軍馬의 屍體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로군 戰士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多富院 진실로 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安息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多富院은 죽은 者도 산 者도 다 함께 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을해년 조지훈 시를 류영희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