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page


242page

6.25의 참상 잊을 수 없는 민족의 "한"과 "상처"인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며,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참화로 인해 45%에 이르는 공업시설이 파괴도는 등 한반도 전체가 폐허화 되었고 한국 민간인 인명피해는 990,968명(사망 244,663명, 학살 128,936명, 부상 229,625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이며 한국군 및 유엔군 인명피해는 전사 178,569명, 부상 555,022명, 실종 28,611명, 포로 14,158명 등 총 776,360명에 달한다. 전라북도의 인명피해는 사망 40,462명, 학살 14,162명, 부상 15,364명, 납치 7,210명 행방불명 14,609명 등 총 91,807명이다. 진안군 백운면의 경우 1951년 3월 14일 백암리 덕태산에서 빨치산 충남도당위원장이 인솔하는 빨치산 20여명의 공격을 받아 백마성 청방부대 부대원 수십명이 전투 중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1951년 9월 6일에는 전북북부도당 및 충남지역 빨치선 500여명이 보급투쟁을 위하여 진안군 백운면 반송마을과 근처 5개 마을을 기습 유린하였다. 이를 파악한 진안경찰서 백운지서장은 9월 7일 4개 분대 49명의 병력을 편성하여 빨치산 70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하였으며 박격포 3문, 소련식 장총 3정, 각종 소총 32정을 노획하였으나, 아군도 2명이 행방불명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1951년 3월부터 1953년 3월까지 덕태산과 선각산 일대에 은둔하고 있던 빨치산과 전투에서 백암리 연두골과 바위골, 노촌리 비시랭이, 신암리 원적골 등에서 경찰 및 주민 80여 명이 전사하거나 학살 당했고 야밤을 틈 탄 빨치산의 노략질로 농가의 소 수십마리와 쌀을 비롯한 많은 생활용품을 강탈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