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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처음부터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다. 선임 들의 연이은 전역으로 시범열 동작조의 인원 은 부족하기만 했고, 너무 추운 날씨 때문에 훈련 여건도 좋지 못한데다 부상자가 속출했 다. 하루 7시간 과업시간 외에도 별도로 개인 훈련을 실시 21인조 대형의 시가 행진 및 시 범 동작을 맞춰보았다. 나 역시 당시 실력은 많이 미숙했지만, 진해 행사 명단에는 이름 이 올라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급박하고 힘든 시기였다. ‘21명이 단 하나의 동작을 해 야 하기에, 나 한명의 부진은 우리 모두의 부 진으로 이어진다’ 라는 압박감에 부담감은 극에 달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손가락 염 좌와 군데군데의 근육통으로 파스냄새가 하 루도 멈추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 려움 속에서도 항상 나에게 힘이 되었던 것 은 부대의 선임들과 동기들, 그리고 후임들이었다. 훈련시간에는 호 랑이 같기만 하던 선임들도 훈련이 끝나면 나를 따로 불러서 부족한 점이나 요령들을 짚어주고 격려해 주었다. 동기들과 후임들 역시 항 상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나의 꿋꿋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잦은 폭 설로 인한 제설작업과 빠듯한 야간근무에도 지칠줄 모르고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도 그렇게 지나갔다. “예, 이제 다음달입니다. 안 힘들어요. 계속 했던건데요 뭘. 엄마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아들래미 보면 깜짝 놀랄겁니다.” 3월이 다 되어서야 우리 정예 21명은 제법 구실을 갖춘 동작조를 이루었다. 이때부터는 보다 완성도 높은 동작과 완벽한 외적 자세를 갖추기 위한 행사 장구류 정비에 심혈을 기 울였다. 새로 제작된 시범 병기도 모두 완성 이 되었고, 철모, 탄띠, 전투화 모두 필요한대 로 교체하고 보수하며 준비를 거듭했다. 진 해 페스티벌전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여러 행 사들은 우리 진해 시범열 동작조의 소중한 밑 거름이 되었고,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이었다. 그때마다 간부님들과 선임들은 나와 우리의 부족한 점을 꼬집어 주었고, 우리 모두는 그 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래, 애들 다 연락했지? 내일 모레 간다 고 이제. 안 오기만 해라. 나 평생 못 볼 줄 알 아 그럼.” 4월 6일 33명의 의장대 대원은 기대반 걱 정반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로 향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생 각도 했지만 너무 큰 무대였기에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진해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우리 해병대 뿐만 아니라, 육·해·공군 각군 군악 의장대와 미국, 뉴질랜드, 태국 등 각 나라 참가팀들이 저 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격을 기다리는 전투병 마냥 기세등등해 있었다. 리허설 공연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참가팀들은 서로 질세라 눈치 싸움이 살벌했다. 서로의 공연은 실수를 잡아내기 위해 뚫어져라 지 켜보고, 각자의 공연은 실수를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대망의 4월 8일, 힘찬 축포가 진해 세계 군악 의장 페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