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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ople 사실 군대를 다녀온 대부분의 남자는 훈련의 힘든 과정을 얘기하 기에 바쁘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역시 작가였다. “토요일 오전에 청소를 하고 나서 잠깐 자유 시간을 갖는데 날씨가 너무 좋은거예요. 그 하늘을 보는데 너무 슬픈거예요. 머리는 삭발하 고 몸에도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멍하니 서있는데 너무 비참하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하늘을 봤던 기억이 나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그 기억. 하지만 쉽게 기억해 내지 못하는 바로 그 장면을 석정현은 얘기하고 있었다. 날씨 좋은 날 한가로운 파란 하늘을 볼 때의 그 공허함.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머 릿속에 떠오르는 그 기억. 그 한 컷의 그림을 떠오르게 만든 그는 분 명 작가였다. 하지만 수료를 하고 가족을 만나던 날을 묻는 질문에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기억을 꺼내보였다. “가족면회 때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너무 쏟아지는 거예요. 그냥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 하도 벅차서 눈물 콧물 다 흘리는 거죠. 제대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 복구되지만. 그때는 정말 가족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기 회였죠. 그래서 어른들이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 된다고 하는구나 싶었죠.” 수료 후 그는 김포에 배치를 받게 된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 냐는 물음에 그는 신기한 기억을 더듬어낸다. 실무 첫날 닭털을 뽑아 야 해서 치킨에 대한 묘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이야기. 누구나 할 수 있는 힘든 훈련의 기억이 아닌 일상의 소소한 기억들을 꺼내놓는 그 가 신기했다. 분명 다들 경험했지만 잊고 있었던 그 기억들을 꺼내놓 는 걸 보니 작가라는 타이틀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것을 잘 기억해요. 많이 보려고 노력도 하고. 그런 부분 을 그림으로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죠. 해병대하면 다들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건 다 아는 거니까 그보다 좀 의 외의 모습을 얘기해주면 “맞아! 그런 것도 있었어! 그런것을 기억하고 있냐!” 면서 좋아하게 되죠. 작가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걸 나도 똑같 이 얘기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가급적 다른 부분을 보고 말하려고 노력을 해요. 다른 사람도 경험을 했을텐데 잊고 있었던 부분을 꺼내 는 거죠.” 흔히 미술학도들은 군대에 가면 손이 굳는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석정현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친다. 그의 군 생활을 더듬 어 보면 그림 그리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사인지라는 것이 있었어요. 종이 에 멋진 그림을 그리고 군가 가사 같은 것을 적은 종이. 그런 종이들을 파일에다 끼워서 전역할 때 가져 나가죠. 그런데 복사본을 복사하고 또 복사하고 그러다보니 질이 너 무 안 좋은 거예요.” 미술학도였던 석정현에게 선임들은 사인지를 그려보라고 주문했 다. 그 수준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에서보다 열 배는 더 많이 그림을 그린 것 같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그렸어요. 중대장님도 가족사진을 그려달라고 하기도 했고. ‘병돌이’, ‘병순이’라는 캐릭터도 그리고 줄도 그어서 편지 지로 만들었었는데, 제대하고 2년 있다가 면회를 가서 읍내에 마크사 를 들렀는데 제가 그린 편지지를 복사해서 팔고 있는 거예요.(웃음)” 그 때 그림을 그리던 경험은 그의 작품, 기술, 정신 모든 면에 있어 영향을 끼쳤다. 대학생 시절보다 더 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기술적으 로 향상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를 들어서 선임들이 자기 사진과 전지현 사진을 주면서 둘이 껴 안고 있는 모습을 그려 달래요. 두 개를 합쳐서 구도, 포즈, 표정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려다 보니 연습이 안 될 수가 없죠. 일단 전지현 을 전지현처럼 그리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요.” 사회에 있을 때보다 10배는 더 그렸다는 그 작품들은 그가 미대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할 때 고스란히 그의 포트폴리오가 돼 주었다. 해병대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그의 전역 후 작품에서도 계속 찾을 수 있다. 그의 데뷔작인 ‘귀신’의 코멘터리에서는 만화를 구상한 계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1999년 전역하기 2달 전에 연평해전이 터졌을 때였어요. 뉴스를 다들 보고 있는데 데프콘2가 발령이 되었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이제 진짜 전쟁인가보다 싶었는데 기자가 데프콘이 아니라 워치콘 이라고 정정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들 낙담하 고 공포에 질린 모습 아니라 다들 투견같은 싸우기 직전의 그런 표정 이었어요. 그냥 평범해 보이던 청년들이 순간 다들 전사화가 되버린 거예요. 그 때 오싹했어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이런 것이구나. 그 후로 자유 시간에 끄적이면서 전역하면 이런 걸 해봐야겠다고 생 각했죠.” 군 시절의 경험이 작품 자체의 모티브가 되었지만 그림 자체에서 도 해병대 특유의 느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