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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금수강산 삼남의 지붕에 공산비적이 반거하게 된 것은 1950년 6월 25일 낙동강 방어선까지 남침했던 북괴군이 우리의 총반격에 다시 쫓겨 가게 되었다. 이곳 옥당골 순창은 1950년 7월 23일 북괴군 6사단 방호산 부대가 침범하였고 UN군의 인천상륙과 낙동강전선이 무너지자 그 잔당이 지방공비와 합류 일부가 이곳에 근거를 두게 됨으로서 부터이다. 특히 이곳 강천산 원등계곡은 패주한 인민군 6사단 고급 참모와 지방 일부 노동당 간부가 합세하여 혼합유격대를 편성 후방에서 투쟁하기로 결의한 위치이기도 하다. 당시 이들 적도의 세는 5천여 명에 달하였던바 첨험의 산세를 이용하여 도량하였고 그 지역이 이곳에서 동북간 회문산 839고지의 영산이며 풍수지리설에 天馬東走 鴻雁南飛 (천마동주 홍애남배)와 五仙圍碁(오선위기)는 文千武萬(문천무만)이 배출된다는 명산으로 여기에 공비의 총사령부가 위치 발호하였고 남으로는 험준한 산세 가마골은 제2의 거점으로 서편으로 여분산 내장산 일대를 유격거점으로 공비 독수리 번개 백암 왜가리 부대 등 13개 병단을 편성하여 양민학살과 납치 재물의 약탈과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낮에는 태극기 방에는 인공기 나부끼는 양상이 되었다. 이때 지리산 회문산 가마골 공비거점을 중심으로 국군2개 사단 경찰병력 2개 연대 주변 경찰서 의용대한청년단원특공대등이 힘을 모아 이들을 대적함으로써 1952년을 고비로 그 세력을 꺾고 1954년 10월에는 잔당조직의 뿌리를 잘라 드디어 이를 섬멸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때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또한 군경과 일반지원단체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 이곳 곡창에서 격양가가 메아리 칠 수 있겠는가. 다시금 고개 숙여 그날 그들 임들의 충혼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