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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 수복개요. 서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도당의 남침으로 이 고장이 반공인사학살 가산몰수 의용군강제동원등으로 공포와 전율에 싸여을때 뜻있는 우국반공인들은 정읍으로 피난하여 고향수복의 기회를 엿보든중 1950년 11월 20일 30여명의 동지들이 모여 전주에 가서 당시 전북계엄 민사부 차장이였든 홍영기중령의 도움으로 남원을 거처 순창에 도착하여 23명은 순창경찰서 의용경찰 제1기로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이수하고 나머지 동지들은 향토수복을 위한 후원의 일을 명받고 담양주둔 국군 11사단의 지원하에 고향수복을 위하여 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우리 복흥초등학교에서는 소위 인민재판중이여서 그 현장을 공격하여 수명의 양민을 구했다. 그 후 우리 복흥수복부대는 전투력약화로 부득기 순창으로 후퇴하여 회문산토벌작전등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당시 주위의 정항은 수복된 지역에서 패퇴하는 지역공산도배및 인민군패잔병이 수개병단을 구성하여 회문산 가마골 쌍치등 산간에 운집하여 국군과 정규전과 같은 전투를 벌렸으며 그 수는 남노당 전북도당및 각 시군도당을 합하여 무려 1만여명에 달해 국군 11사단 병력과 수적으로 동등한 전력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복흥수복부대는 국군및 국민방위군의 지원을 받아 1951년 2월 19일 다시 고향땅에 진주하게 되었다. 그 후 전투는 매일같이 계속되었고 1950년 8월부터 1953년말까지 3년여에 걸친 수복작전에서 반공인사피살자와 작전중 전사자를 합하면 총 희생자는 114명에 달했으며 전란중에 어디로 가야 사는지 어쩔줄을 모르고 피난길에서 방황하다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 면민은 1천명에 달했다. 어느듯 전화는 가시고 평온이 찾아오던 1953년봄 당시의 동지들이 복흥수복동지회를 조직하여 전쟁처에서 아무데나 묻어놓은 전사한 동지들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한곳이 바로 이곳 충혼탑이다. 여기 모시지 못한 많은 반공희생자는 각기 가족묘역에 안장되어 게시다. 그 후 정부의 지원과 뜻있는 분들의 성금으로 묘역을 가꾸었고 매년 현충일이면 추모제를 올리며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