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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時에 國政이 解弛하여 國內에는 貧官汚吏의 橫暴가 恣行되고,國外로는 東蠻 西夷의 侵略이 甚重하여 民生이 토탄에 빠진지라 이에 慨歎한 公은 同志를 모아 大勢를 是正하려고 東學에 入道하여 檀紀 四二二七年 甲午에 革命을 일으켜 除暴救民 斥洋斥倭의 旗幟를 높이 들고 奮鬪하였으나 外國 軍隊의 介入으로 革命偉業은 중도에 挫折되었다. 그러나 公은 初志를 不屈하고 同志 糾合과 心身鍛鍊에 더욱 注力하여 檀紀 四二三七年 甲辰에 斷髮黑衣의 開化運動에 首接主로 活躍하셨으며, 全羅道 巡喩委員, 天道敎道師, 敬道師, 中央總部監事正 等의 敎職을 歷任하셨다. 檀紀 四二五二年 乙未 三月 一日, 擧族的 大義擧인 自主獨立運動에 民族代表 三十三人中 一人으로 抗日運動을 領導하시다가 倭警에 被檢되어 西大門監獄에서 二年間 獄苦를 겪으시던中 얻은 病으로 檀紀 四二五四年 辛酉 三月 二十三日 五十六歲를 一期로 怨死하시었다. 公의 墓所는 井邑郡 北面 馬亭里에 있었으나 場所가 狹小하고 環境이 不適하며 墓墳이 崩壞하고 草莎가 頹脫하여 空山落木 一 土에 庸條荒凉한 慘狀은 目不忍見이었다, 이에 慨歎한 지방 人士의 發起로 公이 가신지 四十五年을 경과한 檀紀 四二九八年 乙巳 六月에 官民 一體의 渾然한 精誠으로 이곳을 澤하여 公의 遺骸를 社會葬의 禮式으로 安葬하고 墓碑를 竪立하여 公의 遺德을 追慕하는 바이다. 兄弟여, 姉妹여, 後世를 繼承할 靑少年들이여, 公의 遺骸를 吉地에 安葬하고 莊嚴한 墓碑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