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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피학살묘. 이곳 6.25피학살묘는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연합군에 의해 수복되자 인민군들이 1950년 9월 30일(음 8월 16일) 정읍경찰서에 수감된 반공인사 5백여명 가운데 150명을 이곳 고부면 입석리 채금광을 끌고 와 몽둥이 돌, 총 등으로 학살한 후 생매장하고, 나머지 3백50여명은 유치장에 감금한 채 타이어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유치장 방화로 희생된 인사들의 시체 일부는 유족들에게 인도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나머지는 충무공원에 합동으로 안장(42주지묘)하였으며 폐금광 희생자들의 사체는 현장이 30여m에 달하는 수직갱인 데다, 동란직후의 사회불안으로 연고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매몰된 채로 방치되어 왔다가, 피학살 당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영원면 앵성리에 사는 고 곽영기옹이 유골인양을 각계에 호소하여 1994년 9월 7일(6.25피학살 유골인양및 안장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당시 정주시 새마을 지회장인 이종섭씨를 선출하여 1994년 9월 9일 발굴사업이 시작하게 되었다. 발굴사업이 시작된 뒤 지하 약30m지점에서 유골이 처음 발견되었으며 70~90m사이에서는 대량으로 발굴되었고, 지하 106m까지 발굴작업을 실시하여 1995년 3월 5일 6개원여 간의 작업을 완료한 결과 두개골 20여구를 포함하여 유골 30상자와 신발 42개, 포승줄 18개, 죽창, 혁띠, 수류탄, 탄피 등이 발굴되었다. 당시, 유골인양 작업은 가계 각층의 많은 시만과 기관단체및 군부대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지만 인양작업에 필요한 장비와 전문인력이 없는 매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명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종섭추진위원장, 김성철총무, 박석규현장감독, 오승용 기술책임자등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오로지 유골을 인양하여 영혼을 위로하겠다는 신념과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영령들의 보살핌이 있었기네 가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