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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비운의 부대 ‘김포사’와 김포지구전투 한강방어선전투의 전과는 비운의 부대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포사는 전쟁 발발 직후인 26일 오전 전략적 요충지 김포에 위치하고 있던 남산학교(정보학교) 기간요원(장교 10명, 사병 30명)을 모체로 편성된 부대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대령) 남산학교장은 우리 군의 서쪽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 6사단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김포사는 장갑차 1개 소대와 1사단 12연대 2대대 등 4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꾸려졌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편성돼 제대로 된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채 전장에 나서야만 했다. 전투는 26일 북한군 6사단이 김포반도에 상륙을 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날 오후 6사단은 김포반도 서쪽을 통해 도하에 성공했고 다음날에는 김포반도에 안착한 주력 부대가 본격적인 전진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장영문(소령)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김포사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적의 파상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김포사는 김포읍에서 김포비행장, 다시 소사읍까지 밀려났다. 김홍일 사령관은 28일 우병옥 중령을 새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다시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저지에 사력을 다했던 김포사는 이미 전력의 절반이 떨어져나간 열악한 상황이었다. 김포사는 이런 악조건에서 29일 김포비행장 탈환에 나섰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결국 실패했다. 심지어 우 사령관까지 작전 실패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면서 김포사는 사실상 와해됐다. 김포사는 빈약한 무기와 탄약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에서 손꼽히는 전투부대인 6사단에 맞서 3일 이상 진군을 늦추며 한강방어선 서쪽을 노리던 적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김포사의 마지막 전투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들의 분전이 없었다면 한강방어선도 더 빨리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것이 잊혀진 김포사와 김포반도전투의 의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